밀리언달러 호텔은 실제 로스앤젤레스에 존재한다. 이 호텔은 1914년 지어질 때만 해도 루스벨트 같은 대통령이 캘리포니아에 올 때 이용하는 최고급의 품위와 화려함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레이건 정부의 사회복지 삭감 정책 이후 오갈 데 없는 부랑자들이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뒷골목의 싸구려 호텔로 쇠락해 버렸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와 실을 백만장자 호텔이라는 모순의 이름에 고정시킨 채 빔 벤더스는 다시 한번 지상의 마천루에서 스스로 추락을 선택했던 한 천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것은 슬프고 오래된 이야기,공주를 사랑한 백치 이야기.그러나 알고 보니 공주는 창녀였다. 겉으로 스릴러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영화는 사실 스릴러와는 거리가 멀다. 호텔에서 투신 자살한 '이지'라는 청년은 기실 백만장자 언론 재벌의 아들이고 그가 그린 그림을 팔아 한밑천 잡으려는 호텔 사람들 앞에 FBI 수사관 '스키너'가 찾아온다. 한 청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스릴러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톰톰'이라는 백치 청년의 내레이션 속에 담긴 아름다운 처녀 '엘로이즈'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빔 벤더스는 처음부터 저능아인 톰톰의 내레이션을 앞세워 철저히 백치의 눈길로 세상과 여자와 투숙객들을 바라본다. 사실 호텔을 드나드는 누구나에게 상처는 있고 심지어 목에 깁스를 한 채 꼬치꼬치 논리와 이성을 찾는 수사관 스키너조차 겉치장을 벗어 버리자 노틀담의 꼽추처럼 이지러지고 휘어버린 척추가 드러난다. 언론들은 벌떼처럼 몰려와 이지의 과거를 게걸스럽게 낚아 올리고 진실은 푸른 연기처럼 모습을 감춘다. 이지가 히피에서 성인으로 둔갑하는 사이 그를 가장 잘 알았고 사랑했던 톰톰은 반대로 백치에서 살인자로 한 계단 한 계단씩 추락한다. 그래서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장식하는 톰톰의 자살은 오히려 세상이 정해놓은 정상과 비정상의 금을 넘으려는 빔 벤더스 자신의 초월적 비상이 깃든 애잔한 날갯짓처럼 보인다. 현실과 환상,속세와 천상의 금을 지우며 '밀리언달러 호텔'은 IQ 70인 베를린 천사가 부르는 비가가 되어 갔던 것이다. 질주와 추락.스스로 선택한 사랑을 믿는 남자.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이야기에 느린 도르래를 매어 단 푸르스름한 호텔 옥상은 U2의 애잔한 기타 선율에 힘입어 천상의 이미지를 스크린에 각인시켰다. 한때 '베를린 천사의 시'나 '파리 텍사스'에 영혼이 데인 이들에게 '밀리언달러 호텔'은 또 한번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겠지만 구원과 사랑이라는 빔 벤더스의 믿음은 이제 사막을 사막인 줄도 모르고 건너는 우리 시대의 낙타들에게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공허하고 거대한 도시의 신기루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심영섭(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