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하는 여성,특히 결혼한 여성이라면 슈퍼우먼에 대한 환상은 버리세요. 직장 일에 전념하는 동시에 살림도 완벽하게 할 순 없거든요. 매순간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그때그때 충실하는 게 최선이라고 봐요. 전 중요한 방송을 앞두고는 여타의 중요한 일도 다 접었습니다. 대신 휴일에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과 가정생활의 밸런스를 잡았죠." CJ39쇼핑 방송사업부의 고려진 이사는 지난 60~70년대 TV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던 명 아나운서에서 80년대 후반부터 TV홈쇼핑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 동종업계 유일한 여성 이사로 우뚝 선 인물이다. 직장에 들어가는 여성 대부분이 멋진 커리어우먼을 꿈꾸지만 10년 이상 직장생활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 현실 속에 40년 가까이 정상을 지켜온 그의 모습은 많은 "후배"들이 참고사례로 삼을 만 하다. 그가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62년 KBS 제주방송(라디오) 아나운서로 입문하면서부터.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웅변대회를 휩쓴 그에게 주변에서는 다들 "맑고 카랑카랑한 음성이 예사롭지 않다"며 아나운서 되기를 권했고 자연스럽게 지원하게 됐다. 입사한 뒤 신나게 스튜디오를 누비던 그는 회사 추천으로 미인대회에 출전,"미스 탐라"로 뽑혔고 당시 유력 여성지인 "여원" 표지모델이 되면서 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재원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여기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 무대로 나가야지"하는 생각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력서 한 장만 들고 당시 아나운서들 사이에 대선배로 통하던 임택근씨를 만났는가 하면 당시 개국 준비중이던 동양방송(TBC)의 고위 관계자를 찾아가 오디션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TBC TV 개국과 함께 아나운서로 스카웃됐다. 이후 15년 여 동안 TBC에 근무하면서 뉴스 좌담 생활정보 프로그램 주부대상 프로그램 등 모든 종류의 방송을 섭렵했다. 얼마나 즐겁고 신나게 일했는지는 4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난 평생 큰 어려움 없이 지냈다"고 자평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런 그가 겪은 단 한번의 난관은 80년대 방송 환경이 바뀌고 프로그램 진행자들에게도 코믹한 요소가 요구되면서 부터.늘 아나운서란 직업에 자부심을 가져온 그는 우스개 소리를 하고 쉽게 웃어줘야 하는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고 결국 87년 은퇴를 결심했다. 이후 홈쇼핑을 통해 컴백하기 전까지 방송생활은 전혀 하지 않았다. "부르는 곳은 여러곳 있었지만 내 소신을 꺾어가면서 출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 "오늘 이 만큼이라도 내 자리를 확보하게 된 것은 나름의 철학을 고집한 덕분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쇼 호스트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부터.예전 삼구쇼핑의 개국 첫 방송을 맡은 이후 7년간 CJ39쇼핑의 간판 쇼 호스트로 일해왔다. 줄곧 방송을 진행하면서 자사 쇼 호스트 교육도 함께 해온 그는 지난 2000년 8월 이사로 승진했다. 지금도 매주 4회 방송에 출연하면서 주 한차례 쇼 호스트 교육을 주관하고 경영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1인 3역을 해내고 있다. 그는 "쇼 호스트란 정보 전달을 주 업무로 하고 아나운서보다 운신의 폭도 넓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간단한 소개를 넘겨 받은 후로는 제품을 면밀하게 연구해 1시간 동안 전달할 내용을 모두 본인이 직접 작성해야 한다. 결과가 좋건 나쁘건 상품판매 성과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한다. 이 때문에 쇼 호스트는 단순한 방송인이 아니라 판매 담당자의 역할도 맡는다. 이 대목에 대한 고 이사의 성실성은 남다르다. 직접 소비자 입장에서 제품을 관찰해야 정확한 설명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제품을 구입해 직접 써본다. 덕분에 그는 CJ39쇼핑에서 보석을 가장 많이 구입한 최우수 고객으로 꼽히기도 했다. 직장생활하는 여성 후배들에게 하고픈 조언을 묻자 고 이사는 "난 여성이다"란 생각을 버리라고 주문했다. 좀 과한 표현인 듯 하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혜택을 받게 되면 권리도 하나 둘 잃게 된다"는 것.어떤 위치에서든 동등하게 실력으로 겨뤄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고 이사는 1남1녀를 뒀고 이 가운데 딸(29.대우통신 근무)은 올 6월 첫 아기를 낳는다. 곧 할머니가 되고,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왠만한 40대 여성 뺨치는 외모를 갖고 있는 것은 평생 지녀온 긴장감과 자기 관리를 위한 노력 덕분인 듯 했다. 조정애 기자 jc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