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전자제품 수입 유통회사인 A사는 인천국제공항 교통센터에 주차위치확인기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공급원으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제품 수입을 끝냈을 때 갑자기 국내 회사인 K사가 복수 납품업체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 K사는 "우리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국내 기관에서 우선적으로 구매해줘야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세우며 인천공항에 독자공급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회사는 정작 제품 생산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공항측은 A사 상품의 최종 품질 검사와 설치를 차일피일 미뤘다. 배경을 알아보니 K사가 고위층을 동원해 인천공항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A사는 결국 이 사실을 코트라의 옴부즈만사무소를 통해 공론화했고 공급자 선정 통보를 받은지 1년만인 작년 9월에 제품 설치를 끝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A사는 창고 관리 비용과 대금 입금 지연 등으로 큰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인천공항 방문객들도 불편을 겪어야했다. 미국계 건축업체 H사는 관청 공사가 걸려 있는 경우 시청이나 구청에 아는 사람이 많은 설계사무소를 통해야 일이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때문에 큰 프로젝트가 걸려있는 경우 자주 술자리를 마련해 설계사무소 사람들을 접대하고 때로는 돈 봉투를 준비한다. 이 회사의 L이사는 "법이 오히려 자유경쟁을 가로막고 편법을 동원케하고 있다"며 "미국 본사에서는 설계사무소에 들어가는 접대비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라고 털어놨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국내에 들어온 외국투자기업 수는 지난해 1만개를 돌파했다. 취업비자로 들어와있는 외국인들만 해도 벌써 2만7천명. 이중 많은 외국인들이 부패 지수 순위 세계 42위인 한국의 실태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며 성토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 경영자들이 불만으로 지적하는 것은 고위직에 아는 사람이 몇명 있느냐에 따라 일의 진행 속도가 결정되는 ''인적 연결 문화''. 미국계 유통회사인 B사의 P실장은 이에 대해 "한국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시하는 사회 문화를 가지고 있어 사업할 때도 서로를 봐주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는 "한국은 변호사법에 따라 변호사만이 이해 당사자를 대신해 금전을 수수할 수 있도록 돼있어 로비가 더욱 불투명하고 음성적으로 변질된다"고 지적했다. 또 "미국처럼 로비스트를 등록하고 공개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보다 투명한 행위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외국인들이 지적하는 또 다른 문제는 법이 있으되 지켜도 그만,안 지켜도 그만인 경우가 많다는 것.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이에 대해 각종 강연 때마다 "미국에도 사기꾼 거짓말쟁이들이 많이 있지만 비교적 법이 잘 지켜지는 이유는 탈세하거나 증권거래법을 어기면 반드시 감옥에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돈 잘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탈세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해왔다. 때로는 외국 기업이나 외국인들도 부패문화에 물들기도 한다. 지난해 국내에서 굵직한 인수합병을 추진하고 있던 미국 투자회사 칼라일의 직원 C씨가 매일 밤 향응을 제공받는다며 한국사회를 아방궁에 비유하는 e메일을 돌려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 미국계 C은행에 근무하는 L씨는 "한국 진출 역사가 긴 외국 회사의 경우 접대문화가 유입돼 서구식 이기주의와 한국식 부패의 나쁜 혼합물이 생겨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한국 사회에 있는 누구도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