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혁 < 한미銀 회장 > 위성복 행장은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다. 고향이 같은 데다 서울대 상대에 다닐 땐 같은 하숙방을 썼다. 졸업후엔 나란히 은행에 입사했고 둘다 은행장까지 올랐으니 묘한 인연이기도 하다. 지난 40년 동안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로선 위 행장이야말로 '영원한 뱅커'라고 생각한다. 같은 뱅커로서 부러울 만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우리나라 금융계의 소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학창시절부터 위 행장은 외형적으로는 활달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세심하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한때 문학에 심취해 톨스토이 작품과 유머로 무장했던 위 행장은 미팅(주로 숙명여대 여학생들과)에 나가면 여학생들로부터 단연 인기를 독차지했다. 당시 서울대 상대 동기생중 시중은행에 들어간 사람은 1백여명에 달했는데 은행장에 오른 사람은 위 행장과 나, 두 사람 뿐이다. 지금도 우리 둘은 가끔 이런 농담을 한다. "같은 은행에 들어가지 않았길 천만다행이다. 서로 은행장 자리를 놓고 다투지 않아도 됐으니 말이다" 위 행장은 은행원 시절부터 조흥은행의 CEO(최고경영자)가 돼 보겠다는 스스로의 다짐과 의지가 대단했다. 내가 한일은행(한빛은행 전신) 일본 도쿄지점에서 대리로 근무할때 위 행장은 조흥은행 대리시험에 수석 합격해 6개월간 일본에 연수를 왔다. 그때 내가 근무하는 도쿄지점 근처에 방을 얻어 대학 시절 하숙생활을 떠올리며 거의 매일밤 선진금융기법에 대해 토론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위 행장 만큼 금융과 기업을 잘 아는 뱅커는 지금도 거의 없다고 본다.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아이디어, 과감한 추진력 등은 친구이지만 감탄스럽다. IMF체제 이후 금융권에도 젊은 경영진들이 속속 진입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금융위기를 온 몸으로 해결했던 위 행장의 경험은 분명 우리 금융계의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마침 위 행장이 한국경제신문사가 제정한 '다산 금융상' 대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말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우연일지 몰라도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정신과 실학사상을 기려 제정된 이 상을 위 행장이 받게 된 것은 또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다름아니라 위 행장의 선조인 존제(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1727~1798년)이 조선시대 후기에 다산 정약용 선생과 학문과 정신적 교류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세학 경학 지리 역사 의학 등에 두루 통달했던 위백규 선생은 영.정조 시대를 살았던 실학자로 호남 실학의 3걸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분이다. 바로 위 행장의 고향인 전남 장흥의 본가도 위백규 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곳으로 그의 고매한 학문과 강직한 삶의 흔적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런 위백규 선생의 후손인 위 행장이 한국경제신문이 제정한 '다산 금융상'을 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