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15) '지관 스님(가산불교硏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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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들어서니 반듯이 다듬은 돌로 포장한 길 위에 낙엽이 보기 좋게 쌓였다.
찻길에서 몇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속세의 티끌이나 소란함은 찾아볼 수 없고 고요함만 있을 뿐이다.
서울 길음동에서 정릉유원지로 오르는 길 옆의 삼각산 경국사.
고려말인 1325년 창건된 유서깊은 도량이요 한국불교의 대표적 학승인 지관(智冠.69.전 동국대 총장)스님의 수행도량이다.
거처인 무우정사(無憂精舍)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누구시오"하며 문을 열어준다.
방에 들어서니 사방 벽에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이 먼저 눈에 띈다.
책상 위를 보니 방금 전까지 쓰던 원고의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상태다.
지관 스님이 차를 우려내는 동안 당호(堂號)의 뜻이 궁금해 물었더니 대답이 뜻밖이다.
"근심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다만 마음 갖기에 달린 것이지요"
그런데 왜 당호를 무우정사라고 지었을까.
불교의 우주관,세계관에 따라 가람을 배치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중앙의 화장세계를 중심으로 동방 만원세계,서방 극락세계,남방 환희세계,북방 무우세계가 있다.
그래서 경국사에도 중앙의 관음전을 중심으로 만월당,극락전,환희당이 동·서·남쪽에 있고 북쪽 지관 스님의 거처가 무우세계를 상징해 무우정사라고 이름했다는 것이다.
"요새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이 한창 전쟁 중인데 이를 놓고 문명의 충돌이니 대립이니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결국엔 물질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대립하는 것이지요"
지관 스님은 "우리가 그동안 미국 유럽하고 주로 상대하다보니 그쪽에 너무 치우쳤다"며 "이슬람쪽 사람들은 사는 건 어려워도 자기 주관대로 하지 무작정 남을 따라가지는 않으니 그 게 큰 힘"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전통을 너무 쉽게 잊고 버린다는 지적이다.
전통만 고집하는 것도 '개가 마른 뼈다귀 씹는 것처럼'발전이 없지만 현대적인 것이 좋다고 무작정 따라 가서도 안된다는 것.지관 스님은 "모든 것은 항상 꾸준하고 맹물처럼 담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한경쟁의 세상은 각박해서 편안할 수가 없어요.
남을 이겨야 하고 자기만 앞으로 나가야 하니까 옆을 볼 여유가 없는데 그게 뭐 좋겠어요? 나와 남이 함께 살 수 있어야지 혼자만 앞서 가봐야 결국 남는 것은 혼자 쓸쓸히 죽는 것밖에 없어요"
지관 스님은 동·서양이 서로 부족한 것을 배우고 장점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은 최선을 다해 보충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부분은 마음으로 채워야 한다는 얘기다.
그 마음이란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 '지족(知足)'의 자세다.
지관 스님은 "지족을 모르면 맨날 헐떡거리기만 하다 죽는다"고 경계했다.
"옛날에 비해 오늘날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물질문명,과학문명이 발달해 살기가 편해졌다고 하는 것은 몸뚱이만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종교나 정신은 등한시하고 의지하지 않게 되기 십상이지요.
예로부터 고통이 있어야 발심(發心)이 되고 춥고 배고파야 도심(道心)이 생긴다는 말이 있어요"
15세 때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지관 스님은 해인사 강원과 동국대에서 오랫동안 후학들을 지도했고 동국대 총장,해인사 주지를 맡기도 했다.
특히 지난 91년 설립한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을 중심으로 불교학 전문학자를 양성하는 한편 불교학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가산불교대사림'(전15권) 편찬작업에 매진 중이다.
지관 스님은 '3은사'로 모시는 자운,영암,운허 스님의 영정을 벽에 걸어놓고 그 가르침을 항상 되새긴다.
영정 밑에 걸린 자운 스님의 글씨 '悲心施一人(비심시일인) 功德如大地(공덕여대지)'가 눈길을 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 베풀면 그 공덕이 땅덩어리만큼 크다는 뜻이다.
필체와 뜻에 감탄하고 있는데 지관 스님은 책상 옆에 걸어둔 글귀를 가리키며 공인이든 개인이든 경계로 삼으라고 했다.
在公者取利不公則法亂(재공자취리불공즉법난) 在私者以詐取利則事亂(재사자이사취리즉사난) 事亂則人事不平(사난즉인사불평) 法亂則民怨不服(법난즉민원불복)
'공직에 있는 자가 이익을 취함에 공평하지 못하면 법이 어지러워지고 개인들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면 일이 얽혀 어지러워진다.
일이 복잡해지면 인사가 불공평해지고 법이 어지러워지면 백성들이 원망하고 복종하지 않는다'는 뜻.사심 없이 맑고 투명하게 살라는 얘기다.
문 밖의 가을빛이 청명하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