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시내에 자리잡은 중국 최대 종합 가전업체인 하이얼(海爾)그룹 본사. 정문에 들어서자 '海爾是海(하이얼은 곧 바다)', '中國造(중국에서 만든 제품)'라는 커다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이 회사 최고경영자(CEO)인 장레이민 사장(張瑞敏.52)에게 뜻을 묻자 "하이얼이 해외로 뻗어나가 중국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겠다는 의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중국 최대기업 총수라기보다는 .옆집 아저씨.와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하이얼을 통해 중국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모델을 세우겠다"고 말할 때는 얼굴에 결연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앞둔 중국기업의 대응 전략과 포부를 들었다. [ 대담=한우덕 베이징 특파원 ] ------------------------------------------------------------------ -중국이 WTO에 정식으로 가입하면 중국기업들도 무한경쟁의 시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WTO 가입은 중국 기업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먹지 못하면 곧 먹히고 만다는게 무한경쟁의 뜻입니다. 중국기업들은 WTO 가입과 함께 바로 그 무한경쟁의 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WTO 가입으로 많은 해외 선진업체들이 중국으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들은 '늑대(狼)'와 같은 존재입니다. 경쟁력 없는 기업은 그들에게 잡혀 먹히게 될 것입니다. 그들과 싸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같이 늑대가 되는 것이지요. 중국기업은 더 이상 늑대를 두려워하는 '양(羊)'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중국의 앞선 경영인들은 지금 싸움 잘하는 늑대가 되기 위해 발톱을 기르고 있습니다. WTO는 오히려 중국기업에 국제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하이얼은 중국기업 중 가장 국제화가 빠른 업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얼의 세계화 전략은 무엇입니까. "바둑을 잘 두는 비결은 최고 적수를 찾아 그에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기력이 높아지지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은 업계에서 최고 기술을 가진 업체입니다. 우리는 GE와의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해 GE를 벤치마킹했습니다. 그리고 GE의 안방인 미국시장에서 그에게 도전했습니다. '先難後易(어려운 상대를 먼저 공략한 후 쉬운 시장에 진입한다)' 전략이지요. 선진기업과의 싸움을 통해 하이얼은 세계 브랜드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이얼은 지난 10년간 해외시장 개척에 몰두해 왔습니다. 미국 유럽 동남아 등 전 세계 주요 지점에 10개 공장을 세웠고, 해외 3만8천여개의 판매센터를 뒀습니다. 또 현지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6개 지역에 해외 연구개발(R&D)센터를 건립했습니다. 하이얼은 특히 지난 98년 WTO 가입에 맞춘 국제화 전략을 수립, 차분하게 추진해 왔습니다. 이미 WTO에 가입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이얼 제품은 지난해 미국 냉장고시장에서 최고 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미국 가전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비결은 무엇입니까. "설계 생산 판매를 동시에 고려한 '삼위일체(三位一體)' 전략의 승리였습니다. 하이얼은 미국 LA와 실리콘밸리에 R&D센터, 사우스캐롤라이나에 공장, 뉴욕에 판매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지에 맞는 제품을 설계해 현지에서 생산, 현지의 독자 물류센터를 통해 시장에 파고들었지요. 미국의 생산비가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현지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올해 미국내 매출액은 1억5천만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이얼 냉장고가 미국 시장에 진출한 것은 지난 90년대 초였습니다. 그러나 공장은 2000년에 들어서야 가동됐지요. 연간 판매량이 40만대를 돌파, 공장을 설립해도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 나왔기에 공장을 설립한 것입니다. '안정적인 시장을 확보한 후 공장을 건립한다(先有市場,後建工場)'라는 전략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동남아 시장은 이미 하이얼이 장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98년 동남아 금융위기가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은 동남아시아에서 대거 빠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이얼은 오히려 투자를 늘렸습니다. 현지의 가전제품 보급률이 낮다는 점, 구매력에 맞춘 제품이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점 등을 감안한 결정이었습니다. 현지 화폐가치가 떨어져 3분의 1 가격으로 마케팅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금융위기가 한풀 꺾이면서 하이얼 제품은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잠식해들어 갔지요. 위기를 기회로 이용한 것입니다. 하이얼은 중국의 WTO 가입을 위기로 보지 않습니다. 동남아 시장에서 그랬듯 위기 속에 감춰진 기회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이얼의 향후 국제화 전략이 궁금합니다. "크게 관념(觀念)의 국제화, 생산판매 개발의 국제화, 자본의 국제화, 인재조달의 국제화 등으로 나눠 추진될 것입니다. 하이얼이 추진하는 관념의 국제화를 요약하면 '생각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행동은 중국적으로'입니다. 이는 곧 국제화를 추진하되 중국적 현실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중국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해외전략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이얼은 자본 국제화 방안으로 미국 현지법인의 뉴욕증시 상장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인재의 국제화 전략에 따라 해외 법인의 책임자는 모두 현지인으로 채용하고 있지요. 미국의 경우 연봉 25만달러를 주고 업계 최고급 인사를 스카우트했습니다" -지난 84년 냉장고 공장으로 시작한 하이얼은 지금 69개 종류의 가전제품에 1만8백개 모델을 생산하는 거대 가전업체로 성장했습니다. 핸드폰 등 정보통신 분야에도 두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연평균 81.6%의 성장세를 보인 '하이얼 신화'의 성공 요인을 듣고 싶습니다. "중국이라는 커다란 시장이 받쳐 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세계 유수 업체를 제치고 백색가전 분야 세계 6위 업체로 오른 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속도입니다. 하이얼은 세계적인 가전업체에 비하면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많은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축적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약점을 극복한 것이 바로 속도입니다. 하이얼은 지난 2월 각 사업부 최고 담당자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미국법인 대표가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냉장고 냉장실을 상하로 양분하는 중간 받침대 때문에 아래 부분 음식을 꺼내기가 힘들다. 아래 부분을 개조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연구진은 괜찮은 생각이라고 판단했고 그날 밤을 세워 모델을 개발했습니다. 2개월 만에 미국 공장 라인에서 개조된 제품이 생산됐고 지금 미국 월마트에 납품되고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나온 후 2개월 만에 제품이 나오는 그 속도가 오늘날의 하이얼을 만들었습니다. 틈새시장 공략도 주요했습니다. 영국에 가정용 식기 세척기를 판매했으나 실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즉시 시장조사를 다시 했지요. 가정에는 이미 세척기가 충분히 보급됐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노린 것이 학생 기숙사와 단신 가정을 노린 소형 세척기 시장이었지요. 이 분야는 시장이 크지 않아 경쟁업체들이 간과하던 분야였습니다. 하이얼 제품은 이 틈새 공략에 성공했고,이를 발판으로 영국 가전 시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이얼의 경영관리기법은 하버드대학 IMD 등에서 경영학 연구사례로 채택될 만큼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요체는 무엇입니까. "지난 4월초 미국 컬럼비아대와 와튼스쿨 강연을 통해 하이얼의 새로운 관리기법인 '시장사슬'이라는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기존 기업들은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이윤의 극대화를 추진합니다. 그러나 이는 정보통신 시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고객의 만족도를 최대화하지 않으면 기업가치를 높일 수 없는 시대입니다. 고객에게 최고의 가치를 주면 자연스럽게 기업가치는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이를 위해 직원 하나하나는 자주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창출해 가는 '전략적 사업단위(SBU)'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같은 '가치창출 사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떤 기업도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기업과는 어떤 협력을 하고 있습니까. "한국에 정보센터를 설립,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가전분야 선진기술 동향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제품을 수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수출시장이라기보다는 기술협력 시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이얼은 가전제품의 중간재를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으로부터 조달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추진하고 있는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한국업체와 많은 협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woodyhan@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