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시장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간 유통상(브로커)들이 사재기에 나섰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바닥논쟁'과는 별개로 실제 시장참가자들 사이에선 반등을 기대하는 심리가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다. 반도체 시장 분위기를 일거에 되돌려 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바닥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업계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반도체 유통업체들은 가격 변동에 따른 시세 차익에 크게 의존하는 만큼 제조업체들보다 반도체 가격에 더 민감하다. 주식 투자와 같이 반도체 가격이 바닥권에 접어들었을 때 싼 값에 사들여 정점에 파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때문에 반도체 가격이 반등할 때는 예외 없이 이들이 시장에서 먼저 매수를 시작한다. 반대로 가격이 하락할 때는 이들 업체가 앞서서 물건을 던진다. 반도체 유통시장의 브로커는 반도체 칩을 모듈로 조립 판매하며 시장에 개입하는 브로커와 단기적인 시세 차익만을 노리고 공격적으로 거래하는 브로커 등 크게 두가지 세력으로 양분된다. ◇ 앞서가는 모듈하우스 =최근 한 국내업체에 대한 매수 규모를 5배로 늘린 킹스턴테크놀로지와 아이오데이터 트윈모스 P&Y 등 4대 메이저 브로커들이 나름대로 시장에 알려진 전통적인 브로커에 속한다. 이들은 반도체 가격이 추락하던 지난 2월에도 매수에 나서 반도체 가격을 일시적이나마 오름세로 돌려놓은 적이 있다. 킹스턴테크놀로지는 존 투와 데이비드 선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2명이 경영하는 회사다. 월간 평균 1천만개 가량의 칩을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컴퓨터 워크스테이션 디지털카메라 등 각종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메모리를 모듈로 제작 공급하는 회사로 지난해 매출 규모가 16억달러에 달했다. 대만의 트윈모스와 미국과 프랑스에 근거지를 둔 P&Y도 킹스턴테크놀로지와 같은 '모듈 하우스'로 분류된다. 연 매출규모는 각각 8억달러와 5억달러 수준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계인 아이오데이터는 메모리를 비롯한 각종 저장장치와 LCD모니터 PC카드 등 컴퓨터 주변기기를 공급하는 회사로 매출액이 7억~8억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들 메이저 브로커가 거래하는 물량은 1백28메가 D램 기준 평균 월 수천만개 정도다. 반도체 업계의 한 전문가는 "메이저중 한 회사가 가격을 반등시키기도 한다"며 "반도체 수요가 집중되는 하반기로 들어서는데다 윈도 XP 시판 등을 감안하면 최근 이들 브로커의 매수는 반도체 가격 반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 투기적 브로커도 가세 =4대 메이저 브로커 외에 홍콩 등 동남아시장을 근거지로 삼아 공격적이고 투기적인 거래를 하는 세력들도 있다. 투기적인 브로커들은 대부분 대리점 등의 형태로 메이커들과 관계를 맺고 단기적인 투기를 주목적으로 한다. 큰 업체는 한 달에 수백만개 규모의 칩을 거래하기도 하지만 수명이 짧고 부침이 심하다. 거래 규모도 시장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이다. 칩을 바로 샀다가 팔기도 하지만 하청업체에 모듈 제작을 맡겨 시장에 내놓기도 한다. 이들 사이에도 사재기를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주로 동남아시장 영업을 담당하는 또 다른 반도체업계 전문가는 "투기적인 브로커 가운데는 관망세가 우세하지만 일부에서는 사재기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며 "더이상 떨어질 가능성은 많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움직임을 반영해 반도체 메이커들도 가격하락 저지를 시도하고 있다. 대만의 한 모듈생산업체 간부는 "업체들이 그동안 너무 큰 적자를 냈기 때문에 최근 가격을 올려 시장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젤 바이텔릭의 토머스 창 부사장도 "현재의 시장상황에서는 대부분의 대만 반도체업체들이 수익을 낼 수 없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최저가격을 설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전했다. 김성택 기자 idnt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