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관료들의 재벌관이 바뀌고 있다. 구조조정에 대한 시각도 변하고 있다. '개혁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재벌이 '우리 경제를 이끌어 갈 동반자'로 격상되는 중이다. 영업을 줄이고 조직과 인력을 감축하는 소위 축소 지향만이 구조조정의 전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확산되고 있다.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비롯한 재경부 주요 간부들은 최근 '재벌'과 '구조조정'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이를 새로운 단어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 재벌 용어 더이상 안된다 =진 부총리는 지난 25일 기자간담회에서 "자산 총액을 기준으로 30대 기업집단을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기업의 지배구조나 소유구조 경영행태와는 상관 없이 절대 규모만을 잣대로 규제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실례로 하나로통신이나 고합 현대건설 등이 30대 기업집단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런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 부총리는 '재벌'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자산 규모가 크고 계열사 수가 많은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을 재벌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우리도 기업 규모만으로 재벌이라고 부르는 관행을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유.지배구조가 달라지고 회계 투명성이 개선된 만큼 대기업도 더이상 재벌이 아니다"라면서 "재벌 정책과 대기업 정책을 구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재벌이라는 용어는 '군벌' '족벌'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 것"이라며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경영 투명성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가치 판단이 배제된 '비즈니스 그룹' 정도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 구조조정도 시각 교정 필요 =재경부 관계자는 "구조조정은 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을 높여 경쟁력을 제고하자는 것"이라며 "조직 인력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기업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구조조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구조조정'을 '경영개선' 또는 '경영혁신'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진 부총리 역시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같은 얘기를 했다. ◇ 현실적인 걸림돌 ='재벌개혁 후퇴' '구조조정 기피'와 같은 여론 재판을 받을까봐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특히 정권 일각에서는 진 부총리를 현실주의 성향이 짙은 관료로 보고 있어 부담이 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반발은 더 큰 문제다. 기업 규제완화와 관련해 공정위 공무원들을 자주 만나고 있는 재경부 관계자는 "이 사람들이 과거 경제기획원에 같이 몸담았던 동료들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라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공정위 공무원들은 30대 기업집단 제도를 폐지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규제완화에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면서 "시대 변화에 맞게 정책을 개혁하는데 공정위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실제로 공정위는 30대 기업집단 지정제도, 출자총액 제한제도 등의 폐지 주장에 대해 일일이 반박 자료를 내면서 반대 입장을 강하게 하고 있다. 의욕이 과했던 탓인지 지난 24일엔 재벌개혁 정책의 성과가 전혀 없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뿌렸다가 스스로 이를 부인하는 등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