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ization Impact! 외국자본] (4) 빗나간 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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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is good(인생은 즐거워)…'
지난 5월 한미은행을 인수한 칼라일 그룹의 한 직원이 미국의 '친구'들에게 보낸 영문 이메일의 첫 문장이다.
이 한 통의 이메일이 뉴욕 월가의 '가십거리'로 등장하면서 국내 금융계는 세계적인 망신을 당했다.
24살로 약관의 나이인 이 직원은 "한국으로 발령받은 뒤 한국 금융기관들로부터 온갖 향응을 제공받으며 왕처럼 살고 있다"며 "3개의 침실이 딸린 아파트에서 영계(hot chick)들과 매일밤 돌아가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떠벌였다.
이 메일은 메릴린치를 비롯해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등의 투자은행 직원들이 돌려보게 됐고 급기야 미국의 다우존스 블룸버그 통신까지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칼라일 젊은 직원의 '솔직하지만 철없는 행동'으로 가뜩이나 외자계에 주눅이 들어 있던 국내 금융계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한빛은행의 한 임원은 "한국의 부패온상인 접대풍속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동시에 외환위기 이후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외자계의 '빗나간 토착화'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리젠트 케이스도 빗나간 토착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지난 3월 일은증권의 최대주주이자 영국계 리젠트퍼시픽그룹의 한국 지주회사인 코리아온라인(KOL)이 부실 계열사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은증권의 한국인 경영진 해임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당시 KOL측은 일은증권에 대해 리젠트화재와 종금에 대한 출자 및 자금지원을 요구했으나 일은증권 경영진과 노조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파문이 불거진 것.
외환위기 이후 옛 대유증권 경수종금 해동화재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한국 금융시장의 '구원군'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리젠트그룹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리젠트는 또 비슷한 시기에 KOL의 대주주인 짐 멜런 전 i리젠트그룹 회장이 리젠트증권 주가조작 사건에 휘말리면서 검찰 소환을 피하기 위해 영국에 '칩거'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 진출해 있는 대다수 외국계 기업들은 '법규 준수'를 기본 덕목으로 강조한다.
다국적 기업들은 전세계 지사를 '온라인'으로 통괄하는 재무 및 구매시스템을 구축, 음성적인 리베이트 거래나 비자금 조성에 제동을 걸고 있다.
하지만 진출한지 얼마되지 않은 외자계기업들 중에는 빠른 시장침투 등을 위해 불가피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한국적 관행'을 받아들이거나 '어거지'를 부릴 때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불공정 사업자에 대한 과징금을 대폭 인상한 것도 주로 이런 외자계기업들의 횡포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최고 5억원의 과징금으로는 거대 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규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계 한국까르푸가 공정위의 시정명령을 어겨가며 상습적으로 불공정 거래행위를 일삼다가 적발된 데서 비롯됐다.
까르푸는 판촉사원의 인건비와 광고비의 일부를 납품업체에 전가했는가 하면 직거래 형태로 사들인 상품을 각종 구실을 붙여 부당하게 반품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계 월마트와 삼성과의 합작법인인 영국계 테스코도 부당 반품 등의 이유로 과징금을 부과받거나 경고조치를 받았다.
컴퓨터 도매업을 하는 한국후지쯔도 납품업체에 하도급 대금 4천여만원과 지연 이자를 주지 않고 버티다가 공정위의 제재를 받았다.
격년제로 열려온 서울모터쇼가 작년에 무산된 것도 수입차협회의 '횡포' 때문이었다고 국내 업계는 지적한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는 지난 3월 삼성동 코엑스에서 서울모터쇼를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의 부도와 함께 수입차 협회가 집단적으로 참가를 거부하면서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수입차협회와 한국자동차협회가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 어디서도 토종자동차협회가 수입차협회와 공동으로 자국의 대표 모터쇼를 개최한 전례가 없다.
현대자동차 등 토종업체들은 "공동개최 요구는 외자계의 어거지"라고 비난했고 수입차 업체들은 집단적으로 불참결정을 내렸다.
지난 99년에는 세계적인 의료기기업체인 독일 지멘스가 MRI 등 1천5백억원대의 의료기기를 국내 병원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수십억원대의 뇌물을 뿌려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다국적 기업의 '도덕성'을 철썩같이 믿고 있던 '외자 환영론자'들의 입장을 궁색하게 만들었다.
지멘스는 '한국에선 한국인들처럼 하지 않으면 영업이 불가능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이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의 전도사들이라는 다국적기업으로선 궁색한 변명이었다.
기획취재부 오춘호.조일훈.장경영 기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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