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초 한 사십대 남자가 출판사로 찾아와 컴퓨터 디스켓 한 장을 맡기고 훌쩍 떠나버렸다. 연락처라고는 원고 뒤에 적힌 무선호출 번호 하나뿐. 그는 떠나기 전에 한마디 말만을 남겼다. "이 책이 출간된다면 그것은 나의 유작이 될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고심끝에 원고를 검토해봤더니 절절한 사연이 펼쳐졌다. 연락을 기다리다 결국 책을 내기로 결정했다. 벼랑끝에 내몰린 주인공에게 삶의 탈출구를 마련해주고 경제파탄으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수많은 가장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목은 "나도 아버지이고 싶다"(신성호 지음,찬섬,8천5백원). 중년 사업가 하성은 자금난에 허덕이다 부도를 맞고 집까지 경매처분으로 잃는다.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온갖 몸부림을 쳐보지만 쓰라린 실패를 맛보며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견디다 못한 아내와는 이혼하고 사랑하는 딸마저 떠나보낸다. 막노동판을 헤매던 그에게 IMF 파고는 재생불능의 상처를 입힌다. 끝내 영양실조와 간기능 저하로 쓰러진 그는 겨우 목숨을 구해 노숙자를 위한 "자유의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숲가꾸기 참여 희망자 모집 공고를 보고 강원도로 간 그는 힘겨운 날을 보내다가 그곳 폐교의 낡은 관사에 몸을 부린다. 낮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딸을 위해 글을 썼다. 새 밀레니엄이 밝았지만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여름 즈음 산가꾸기 동료였던 김씨 부부가 재기에 성공해 찾아온 것을 보고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꿈에 그리던 아내와 딸. 그러나 밤늦게 집앞에 도착해 불꺼진 방을 올려다보며 망설이던 그의 시야에 검정색 승용차가 들어오더니 그 속에서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내리는 여인,바로 아내였다. 이제 그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이 작품은 한 중년 남성의 자기 고백서이자 몰락한 아버지의 간절한 회생 몸부림이기도 하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