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春기획(6)-벤처리더] 기술승부 : 김희조 <알파텔레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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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SL모뎀,PDA(개인용휴대단말기)을 생산하는 알파텔레콤의 김희조(31)사장은 자수성가한 케이스다.
맨주먹에서 수백억원대의 벤처기업 최고경영자로 홀로서기를 해냈다.
나이도 어린데다 학력 등 탄탄한 뒷배경도 없지만 자신의 꿈을 이뤘다.
김 사장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결과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짧지만 평탄하지만 않은 인생역정이 이를 말해준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수도전기공고를 택했다.
서울산업대 전자공학과에 진학,기술자이자 최고경영자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대학 3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김 사장은 등록금을 마련할 생각으로 1년간 휴학을 했다.
새벽운동 겸 우유배달에 나섰다.
단순 배달보다는 판촉 마진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안 그는 낮에는 유유판촉에 나섰다.
하루에 서울 상계동지역의 아파트 10개동을 공략했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는 마음을 다졌다.
멋진 최고경영자가 되겠다.
이런 집념이 그를 피곤한 줄 모르게 만들었다.
새로 이사온 집이나 어린이용 자건거가 두개 있는 집이 집중공략 대상이었다.
우유의 좋은 점을 알리기 위해 도서관에서 우유와 관련돤 자료를 찾아 보여줄 정도였다.
이런 노력으로 한달에 무려 8백만원씩 벌었다.
93년의 일이다.
그는 "아파트 문을 열어준 사람은 모두 고객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장사꾼의 기질을 보여준 셈이다.
그 결과 1년만에 7천만원이라는 거액(?)을 마련했다.
이 돈이 사업의 종잣돈이 됐음은 물론이다.
김 사장은 95년 대학졸업과 국내에 진출한 일본 반도체 장비업체인 도쿄일렉트론에 취직했다.
97년에 마이크로텔레콤에서 연구팀장으로 합류,4명의 연구원들과 함께 위성방송수신기 개발에 나섰다가 IMF경제위기를 맞았다.
회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김 사장은 4명의 연구원들과 연구개발을 계속했다.
투자자를 유치,98년 9월 알파캐스트를 창업했다.
알파캐스트가 생산중인 위성방송수신기는 유료위성방송용,무료위성방송용,디지털위성방송용,디지털 아날로그 겸용 제품 등 다양하다.
4월엔 자사로고가 달린 DVD플레이어가 이마트 마그넷 등에서 판매된다.
인터넷 붐을 보고 ADSL모뎀을 생산하는 알파텔레콤을 99년에 설립했다.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경쟁기업만 5개사에 달했다.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어야한다고 판단했다.
두개의 칩으로 생산하는 방식을 탈피,한개의 칩으로 모뎀을 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당연히 경쟁사보다 가격경쟁력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기술도 앞섰다.
김 사장은 "한발 앞으로 나아가 시장을 보니 길이 보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하반기에만 세계적 통신장비 업체인 노텔네트웍스에 1백억원어치의 ADSL를 팔았다.
올들어 3월까지만 3백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기록적인 성장세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지난해 11월에는 한국능률협회가 주관한 제1회 대한민국 벤처기업 대상에서 정보통신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김 시장은 "올 하반기에 코스닥에 등록할 예정"이라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으로 세계시장을 주름잡을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02)569-0896
김문권 기자 mkkim@hankyung.com
맨주먹에서 수백억원대의 벤처기업 최고경영자로 홀로서기를 해냈다.
나이도 어린데다 학력 등 탄탄한 뒷배경도 없지만 자신의 꿈을 이뤘다.
김 사장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결과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짧지만 평탄하지만 않은 인생역정이 이를 말해준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수도전기공고를 택했다.
서울산업대 전자공학과에 진학,기술자이자 최고경영자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대학 3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김 사장은 등록금을 마련할 생각으로 1년간 휴학을 했다.
새벽운동 겸 우유배달에 나섰다.
단순 배달보다는 판촉 마진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안 그는 낮에는 유유판촉에 나섰다.
하루에 서울 상계동지역의 아파트 10개동을 공략했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는 마음을 다졌다.
멋진 최고경영자가 되겠다.
이런 집념이 그를 피곤한 줄 모르게 만들었다.
새로 이사온 집이나 어린이용 자건거가 두개 있는 집이 집중공략 대상이었다.
우유의 좋은 점을 알리기 위해 도서관에서 우유와 관련돤 자료를 찾아 보여줄 정도였다.
이런 노력으로 한달에 무려 8백만원씩 벌었다.
93년의 일이다.
그는 "아파트 문을 열어준 사람은 모두 고객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장사꾼의 기질을 보여준 셈이다.
그 결과 1년만에 7천만원이라는 거액(?)을 마련했다.
이 돈이 사업의 종잣돈이 됐음은 물론이다.
김 사장은 95년 대학졸업과 국내에 진출한 일본 반도체 장비업체인 도쿄일렉트론에 취직했다.
97년에 마이크로텔레콤에서 연구팀장으로 합류,4명의 연구원들과 함께 위성방송수신기 개발에 나섰다가 IMF경제위기를 맞았다.
회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김 사장은 4명의 연구원들과 연구개발을 계속했다.
투자자를 유치,98년 9월 알파캐스트를 창업했다.
알파캐스트가 생산중인 위성방송수신기는 유료위성방송용,무료위성방송용,디지털위성방송용,디지털 아날로그 겸용 제품 등 다양하다.
4월엔 자사로고가 달린 DVD플레이어가 이마트 마그넷 등에서 판매된다.
인터넷 붐을 보고 ADSL모뎀을 생산하는 알파텔레콤을 99년에 설립했다.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경쟁기업만 5개사에 달했다.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어야한다고 판단했다.
두개의 칩으로 생산하는 방식을 탈피,한개의 칩으로 모뎀을 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당연히 경쟁사보다 가격경쟁력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기술도 앞섰다.
김 사장은 "한발 앞으로 나아가 시장을 보니 길이 보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하반기에만 세계적 통신장비 업체인 노텔네트웍스에 1백억원어치의 ADSL를 팔았다.
올들어 3월까지만 3백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기록적인 성장세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지난해 11월에는 한국능률협회가 주관한 제1회 대한민국 벤처기업 대상에서 정보통신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김 시장은 "올 하반기에 코스닥에 등록할 예정"이라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으로 세계시장을 주름잡을 것"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02)569-0896
김문권 기자 m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