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조의 '風水산책'] (10) '후천개벽의 시발점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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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월은 흘러 원시반본(原始返本)과 천지순환(天地循環)의 이치에 따라 관악에서 되돌아 서울로 돌아가게 되니, 관악의 화는 수많은 한강 다리와 철교를 넘어 수를 극복하고 노고산-와우산-연희고지(일명 백사고지) 연맥의 토를 만나 화생토기 되고 이는 동교동-연희동을 지나 안산과 인왕을 거쳐 북악에 이르러 금을 만나니 다시 토생금이라.
이 금이 수를 만나야 하는데 바로 운현궁 부근의 구름재가 수니 금생수가 이 아닐런가.
이 수는 창덕궁 뒤편의 목성을 만나 수생목을 이루고 목은 다시 북한산-도봉산 연맥의 화성을 만나 목생화거 되니, 이것이 바로 반본과 순환의 개벽이 되는 것이다.
그 방향이 북에서 남으로 상극의 형세를 이루며 나와 다시 남에서 북으로 상생의 형국으로 이어지니 나라의 형편이 밝은 정기에 통일의 기운까지 겹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 과정에서 연희동의 참변을 겪었고 상도동의 혼란을 거쳐 동교동에서 한 마디를 이루어 북에서 꺾어지니 우리는 지금 시련의 종반기에 접어든 형편이다.
땅의 운세를 오행으로 풀어보니 그렇다는 뜻인데 나의 평소 지론은 조금도 변함없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즉 땅은 그저 무대일 뿐이고 그 위에서 연극을 벌일 주체는 결국 사람인지라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가 인사(人事)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자 이제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개벽을 이룬 시발점인 운현궁으로 다시 돌아가자.
조선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출발은 어찌 지리를 얻게 되는가?
앞서 밝힌대로 이곳은 질퍽한 수의 땅이다.
그곳에서 고종이 태어났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신영훈 선생의 믿을만한 증언에 의하면 바로 거기서 고종이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그곳은 지금 없어지고 무슨 문화센터가 들어섰다고 했지만 ''동명연혁고''에서는 노락당을 고종의 태생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노락당은 고종이 등극한 뒤에 의미를 갖게 된 곳이므로 나는 신 선생의 의견에 동조하는 편이다.
어찌 되었거나 운현궁에서 고종이 출생했다는 것은 이견이 없는 사실이다.
앞 회에서 밝힌 것처럼 이곳이 북악의 정맥인 경복궁맥과 창덕궁맥 사이로 수(水)의 성질을 가진 땅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곳은 겨울의 땅이요, 저장의 땅이니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적합한 장소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리 임금을 배출했으면 무엇하겠는가?
자신의 정신병리적 이기심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종국에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된 한많은 장소가 바로 이곳임을 생각할 때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수 없다.
서울 북촌의 부잣집이자 종친으로서 대원군은 왜 그토록 권력에 미련을 두었을까?
고종 등극 후 영의정에 오른 거의 유일한 안동김문의 김병학은 고종의 사저(私邸)인 운현궁 노락당기에서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임금이 되실 운을 받으시고 잠저(潛邸)에서 생활하시다가 임금 자리에 오르시니 ''땅은 그 신령함을 다 하였고'' 하늘은 임금이 되실 조짐을 보이셨다. ''늘 상서로운 빛과 기운이 성상이 기거하시던 지역을 감돌고 있어 탁지부에 명하여 옛터에다 새집을 짓도록 하시었다''"하였는데 그런 기운이 이 운현궁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인근 동쪽에 와룡동이 있고 인왕산이 빤히 바라다 보이니, 이는 청룡과 백호를 갖추었음이라 풍수 이론상 흠잡을데 없는 곳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어찌 만세의 국가 대업을 이루었다 할 수 있으랴?
2대에 망국의 한을 안을 집이라면 비록 내 자식이 임금에 오르지 못할지언정 거기를 주처(住處)로 삼아서는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그리 하였다.
주처란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풍수에서 거(居)와 주(住)는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해야 하는 말이다.
거란 일시 머무는 장소요, 주란 살림을 하며 사는 곳을 일컫는다.
예컨대 폭포 아래라든가 계곡물이 가파른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곳은 잠시 머물며 완상하는 것은 괜찮지만 살 곳으로는 금기시한다.
그런 곳은 바람소리 물소리가 한맺히게 울부짖는 듯한 터(風水悲愁之地)이기에 그런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풍수적으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풍수 이론상 파구(破舊.이미 예전에 썼던 곳) 터는 삼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옛터에 새로이 굉대(宏大)한 집을 세운 것은 이 원칙을 파기한 일이 된다.
세력을 잡았다고 해서 옛집을 파헤치고 근사한 새집을 짓는 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풍수에서 땅은 사람이다.
이는 마치 어려울 때 함께 하던 아내나 친구를 형편이 달라졌다고 해서 갈아치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찌 배신감이 없으랴.
땅 또한 사람과 같은 것으로 파구를 쓰는 법은 아닌 것이다.
지금 고종 탄생지는 무슨 문화 강좌의 모임에 쓰이는 곳으로 흔적이 없어졌으며 다만 고종이 장가를 든 노락당은 중수를 거쳤지만 잘 남아 있다.
명성황후 민씨가 간택된 후 가례 전에 머물던 곳도 노락당이기에 이곳은 대원군의 거처인 노안당과는 달리 홑처마가 아닌 겹처마로 그 격의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가옥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니란 것을 잘 안다.
한가지, 사랑채인 노안당 앞뜰과 안채인 이로당 옆으로는 소나무와 산죽(山竹)이 심어져 있고 곳곳에 괴석을 장식해 놓고 있던데, 이는 조경상의 실수가 아닐는지?
소나무는 잎끝이 뾰족해서 꺼리고 산죽은 바람불 때 스산한 소리를 내기에 집안에 심는 법이 아니다.
괴석은 별장에나 배치하는 것으로 그런 기괴한 장식품이 살림집에 있는 것 또한 정서상의 문제 때문에라도 배제해야 마땅하다.
한가지 가슴 아픈 일은 일제가 이곳에서도 잔꾀를 부렸다는 사실이다.
운현궁에는 양관이라 불리는, 이곳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하나 있다.
현재 덕성여대에 귀속되어 있는 이 건물 터는 본래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이 살던 곳이다.
이 부근에는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의 사당이 있던 자리여서 운현궁에서는 가장 신성한 땅이다.
그런 터전에 일제는 양관을 지어 운현궁을 눈 아래 굽어보게 한 것이다.
마치 창경궁에 박물관이란 양관(후에 장서각)을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지어 창경궁을 제압하도록 한 발상이나 다를 바가 없는 횡포이다.
게다가 건물 상부 장식으로 쓴 국화 무늬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그 의도는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겠다.
설계와 시공을 모두 일본인이 하였음은 두 말할 여지도 없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는 외세 배격이라는 그의 정치관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론의 여지는 없지만 항간에 이런 괴이한 소문이 떠 돈 것은 사실인 듯하다.
즉 대원군이 어느 날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만인을 잡아 죽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정만인(鄭萬仁.그에 관해서는 앞 회에서 설명이 있었음)을 죽이라는 소리였는데 잘못 알아듣고 그 후 천주교도 만인(萬人)을 죽이게 되는 것이라 하지만, 그야말로 바람 같은 헛소리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그런 대원군과는 달리 그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는 뮈텔 주교를 내방(內房)인 이로당까지 끌어들여 성사를 치렀다.
이곳이 왕기 서린 땅이거나 아니거나 내게는 관계가 없다.
왕을 내었으면 무엇하나, 나라를 망하게 했는데 해서 해 본 생각이다.
어쨌거나 땅 기운은 음습하고 거센 것이 사실이다.
수(水)의 땅이라 계절로는 겨울이요, 방위로는 북쪽이니 그런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의 감상 탓만이 아니라 땅의 성격 때문이리라.
[ 본사 객원편집위원 ]
이 금이 수를 만나야 하는데 바로 운현궁 부근의 구름재가 수니 금생수가 이 아닐런가.
이 수는 창덕궁 뒤편의 목성을 만나 수생목을 이루고 목은 다시 북한산-도봉산 연맥의 화성을 만나 목생화거 되니, 이것이 바로 반본과 순환의 개벽이 되는 것이다.
그 방향이 북에서 남으로 상극의 형세를 이루며 나와 다시 남에서 북으로 상생의 형국으로 이어지니 나라의 형편이 밝은 정기에 통일의 기운까지 겹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 과정에서 연희동의 참변을 겪었고 상도동의 혼란을 거쳐 동교동에서 한 마디를 이루어 북에서 꺾어지니 우리는 지금 시련의 종반기에 접어든 형편이다.
땅의 운세를 오행으로 풀어보니 그렇다는 뜻인데 나의 평소 지론은 조금도 변함없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즉 땅은 그저 무대일 뿐이고 그 위에서 연극을 벌일 주체는 결국 사람인지라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가 인사(人事)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자 이제 선천에서 후천으로의 개벽을 이룬 시발점인 운현궁으로 다시 돌아가자.
조선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출발은 어찌 지리를 얻게 되는가?
앞서 밝힌대로 이곳은 질퍽한 수의 땅이다.
그곳에서 고종이 태어났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신영훈 선생의 믿을만한 증언에 의하면 바로 거기서 고종이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그곳은 지금 없어지고 무슨 문화센터가 들어섰다고 했지만 ''동명연혁고''에서는 노락당을 고종의 태생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노락당은 고종이 등극한 뒤에 의미를 갖게 된 곳이므로 나는 신 선생의 의견에 동조하는 편이다.
어찌 되었거나 운현궁에서 고종이 출생했다는 것은 이견이 없는 사실이다.
앞 회에서 밝힌 것처럼 이곳이 북악의 정맥인 경복궁맥과 창덕궁맥 사이로 수(水)의 성질을 가진 땅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곳은 겨울의 땅이요, 저장의 땅이니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적합한 장소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리 임금을 배출했으면 무엇하겠는가?
자신의 정신병리적 이기심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종국에는 망국의 길을 걷게 된 한많은 장소가 바로 이곳임을 생각할 때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수 없다.
서울 북촌의 부잣집이자 종친으로서 대원군은 왜 그토록 권력에 미련을 두었을까?
고종 등극 후 영의정에 오른 거의 유일한 안동김문의 김병학은 고종의 사저(私邸)인 운현궁 노락당기에서 말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임금이 되실 운을 받으시고 잠저(潛邸)에서 생활하시다가 임금 자리에 오르시니 ''땅은 그 신령함을 다 하였고'' 하늘은 임금이 되실 조짐을 보이셨다. ''늘 상서로운 빛과 기운이 성상이 기거하시던 지역을 감돌고 있어 탁지부에 명하여 옛터에다 새집을 짓도록 하시었다''"하였는데 그런 기운이 이 운현궁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인근 동쪽에 와룡동이 있고 인왕산이 빤히 바라다 보이니, 이는 청룡과 백호를 갖추었음이라 풍수 이론상 흠잡을데 없는 곳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어찌 만세의 국가 대업을 이루었다 할 수 있으랴?
2대에 망국의 한을 안을 집이라면 비록 내 자식이 임금에 오르지 못할지언정 거기를 주처(住處)로 삼아서는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그리 하였다.
주처란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풍수에서 거(居)와 주(住)는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해야 하는 말이다.
거란 일시 머무는 장소요, 주란 살림을 하며 사는 곳을 일컫는다.
예컨대 폭포 아래라든가 계곡물이 가파른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곳은 잠시 머물며 완상하는 것은 괜찮지만 살 곳으로는 금기시한다.
그런 곳은 바람소리 물소리가 한맺히게 울부짖는 듯한 터(風水悲愁之地)이기에 그런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풍수적으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풍수 이론상 파구(破舊.이미 예전에 썼던 곳) 터는 삼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옛터에 새로이 굉대(宏大)한 집을 세운 것은 이 원칙을 파기한 일이 된다.
세력을 잡았다고 해서 옛집을 파헤치고 근사한 새집을 짓는 것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풍수에서 땅은 사람이다.
이는 마치 어려울 때 함께 하던 아내나 친구를 형편이 달라졌다고 해서 갈아치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어찌 배신감이 없으랴.
땅 또한 사람과 같은 것으로 파구를 쓰는 법은 아닌 것이다.
지금 고종 탄생지는 무슨 문화 강좌의 모임에 쓰이는 곳으로 흔적이 없어졌으며 다만 고종이 장가를 든 노락당은 중수를 거쳤지만 잘 남아 있다.
명성황후 민씨가 간택된 후 가례 전에 머물던 곳도 노락당이기에 이곳은 대원군의 거처인 노안당과는 달리 홑처마가 아닌 겹처마로 그 격의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가옥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니란 것을 잘 안다.
한가지, 사랑채인 노안당 앞뜰과 안채인 이로당 옆으로는 소나무와 산죽(山竹)이 심어져 있고 곳곳에 괴석을 장식해 놓고 있던데, 이는 조경상의 실수가 아닐는지?
소나무는 잎끝이 뾰족해서 꺼리고 산죽은 바람불 때 스산한 소리를 내기에 집안에 심는 법이 아니다.
괴석은 별장에나 배치하는 것으로 그런 기괴한 장식품이 살림집에 있는 것 또한 정서상의 문제 때문에라도 배제해야 마땅하다.
한가지 가슴 아픈 일은 일제가 이곳에서도 잔꾀를 부렸다는 사실이다.
운현궁에는 양관이라 불리는, 이곳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하나 있다.
현재 덕성여대에 귀속되어 있는 이 건물 터는 본래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이 살던 곳이다.
이 부근에는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의 사당이 있던 자리여서 운현궁에서는 가장 신성한 땅이다.
그런 터전에 일제는 양관을 지어 운현궁을 눈 아래 굽어보게 한 것이다.
마치 창경궁에 박물관이란 양관(후에 장서각)을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지어 창경궁을 제압하도록 한 발상이나 다를 바가 없는 횡포이다.
게다가 건물 상부 장식으로 쓴 국화 무늬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 그 의도는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겠다.
설계와 시공을 모두 일본인이 하였음은 두 말할 여지도 없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는 외세 배격이라는 그의 정치관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론의 여지는 없지만 항간에 이런 괴이한 소문이 떠 돈 것은 사실인 듯하다.
즉 대원군이 어느 날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만인을 잡아 죽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정만인(鄭萬仁.그에 관해서는 앞 회에서 설명이 있었음)을 죽이라는 소리였는데 잘못 알아듣고 그 후 천주교도 만인(萬人)을 죽이게 되는 것이라 하지만, 그야말로 바람 같은 헛소리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그런 대원군과는 달리 그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는 뮈텔 주교를 내방(內房)인 이로당까지 끌어들여 성사를 치렀다.
이곳이 왕기 서린 땅이거나 아니거나 내게는 관계가 없다.
왕을 내었으면 무엇하나, 나라를 망하게 했는데 해서 해 본 생각이다.
어쨌거나 땅 기운은 음습하고 거센 것이 사실이다.
수(水)의 땅이라 계절로는 겨울이요, 방위로는 북쪽이니 그런 기운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의 감상 탓만이 아니라 땅의 성격 때문이리라.
[ 본사 객원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