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조의 '風水산책'] (5) '동작동 국립묘지 <下>'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동작동 국립묘지가 공작이 날개를 편 모양이건, 장군이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모양이건 간에 소위 명당 길지라는 뜻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내게는 그것이 오히려 호랑이가 숲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북쪽을 향해 튀어 나오려는 모양(猛虎出林形)으로 보였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특히 묘지가 조성되기 이전의 사진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수로터리에서 지하철 4호선 동작역 쪽으로 우뚝 솟았다가 한강에 머리를 디밀고 있는 형상이 그렇게 보이더라는 뜻이다.
조성 당시 대민 관계를 고려하여 가급적 민가나 마을이 없는 곳을 선정하였다고 하는데 실제 사진을 보니 초가집 몇 채만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 뒤로 우뚝한 봉우리가 툭 끊어지듯 한강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맹호출림에 역연한 형세였다.
이에 대해서는 지창룡씨도 동작봉의 백호세(위에 언급한 봉우리를 지칭함)가 기운 센 호랑이가 머리를 순하게 엎드리고 있는 모양새라고 언급한 바 있음을 밝혀 둔다.
자, 그렇다면 이곳은 명당인가?
아니다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우선 호랑이가 건너 뛰기에는 너무나 폭이 넓은 한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그런 형국에서는 큰 흠이 될 수밖에 없고, 게다가 요즘은 올림픽대로에 동작터널까지 뚫리는 바람에 호랑이는 그저 그림의 떡만 바라보게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곳이 공작이냐 호랑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국립묘지가 지니고 있는 장소의 상징성 때문에 명당이란 개념의 본질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 같다.
이곳에 모셔진 영령의 대다수는 젊은 사병들로서 후손을 두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음택풍수가 강조하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은 부모의 유골이 받은 땅기운(氣)이 자식에게 전해진다는 전제 위에 성립되는 풍수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동기감응론에 입각한 명당 길지 운운하는 것은 우선 사리에 맞지 않는다.
좀 심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하늘이 준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한이 맺혀 이승을 떠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오히려 스산한 초겨울에 이곳을 주로 찾는 이유가 이곳 땅기운의 양명치 못한 성격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이다.
명당이 무슨 소용에 닿겠느냐는 이유가 아니라 그 분들에게는 그 분들에게 맞는 땅이 명당이겠기에 오히려 풍수 이론상 명당 조건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 된 터잡기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이곳을 찾는 유가족들이 영령의 휴면에 공감하고 주변 경관에서 위로를 얻는 터이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소망인 바, 그 점에 있어서는 적절한 상지(相地), 즉 터잡기라고 보는 까닭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묘소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한 단봉 합장분으로 서향에 가깝다.
이 분은 친자는 두지 못했지만 양자가 있다.
따라서 호랑이 머리 쪽을 향하지 않은 것은 양자를 위하여 잘 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묘역의 제일 위쪽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육영수 여사의 쌍 분묘에 닿는다.
다른 묘와는 달리 이곳은 좋지 않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참배객이 여럿 눈에 띈다.
아직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시기상조인데다가 나 자신은 그의 치세를 썩 달갑게 여기는 쪽이 아니기 때문에 평가를 자제하기로 하거니와 어쨌든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던 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산소의 발복이나 음덕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은지 오래인지라 그저 소일거리 삼아 풍수적 소회를 약술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산-안산(案山)에 해당됨-이 남산이냐 아니면 바로 앞에 그야말로 공작의 알처럼 동동산으로 솟아오른 제1장군 묘역으로 보느냐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남산은 강 건너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안산이 될 수 없지만 대지(大地)에는 예외가 기승을 부리는 법이라 굳이 안될 까닭도 없다.
여하튼 남산 쪽은 멀리 북악과 북한산 연맥과 어우러져 무척 강인하고 강파른 인상을 주지만 제1장군 묘역을 안산이라 본다면 아주 안온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마치 지금 그에 대한 평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하지만 나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다"라는 식이 있는가 하면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군부 통치를 시발시킨 독재자"로 폄하하는 시각 또한 만만치 않은 만큼 땅이 그의 그런 평가를 수용하여 상반되는 해석을 낳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허망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어찌 되었거나 그런 생각 자체가 허망하고 허망할 뿐이다.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는 매우 흥미를 끄는,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전혀 끌지 못하는 서울시 유형문화재가 하나 있다.
조선 왕조 11대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 되는 창빈 안씨의 묘소가 그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선조는 조선조 임금들중 적손이 아닌 서손으로 대통을 이은 첫번째 왕이다.
잠깐 그 가계를 보면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연산군이 폐위된 뒤 왕위에 올랐다.
중종의 맏아들이 인종인데 임금에 오른지 8개월 만에 승하하여 후사가 없자 다시 중종의 둘째 아들인 명종이 재위를 잇게 된다.
하지만 명종 역시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뒤를 이은 것이 바로 이곳에 묻혀 있는 창빈 안씨와 중종 사이에서 난 일곱째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바로 선조인 것이다.
즉 창빈 안씨는 한미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으면서도 손자가 왕위에 오르는 영광을 얻은 셈인데, 물론 그녀는 손자가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런 사실을 알지는 못하였다.
서울 사직동 262번지에 있던 도정궁이 선조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며 후에 덕흥대원군의 사당을 모셨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기인 격암 남사고가 왕기(王氣)가 있음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서는 고종이 즉위함으로써 두번씩이나 왕을 배출한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 있을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은 명종의 동생이었는데 아들이 없던 명종이 덕흥의 세 아들을 불러놓고 임금만이 쓸 수 있는 익선관을 가리키며 "머리의 크고 작음을 알기 위함이니 차례로 한번씩 써보라"고 하자 선조의 위 두 형들은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하였으나 막내인 선조만이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하며 공손하게 받들어 제자리에 가져다 둠으로써 명종의 믿음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창빈 안씨가 별세한 것은 그녀 나이 51세 때인 명종 4년이었다.
처음 경기도 양주 땅 장흥에 모셨으나 다음해 이곳으로 옮겨 왔으니 그로부터 사람들이 이곳을 ''동작릉''이라 부름으로써 지금의 지명을 얻었다는 얘기도 있다.
내 보기에 이곳은 맹호가 숲을 뛰쳐 나가기 전 새끼를 감싸안고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라 가히 국립묘지 묘역 내에서 진혈(眞穴)이 이곳이 아닌가 짐작이 간다.
지금 이곳은 분위기가 음울하고 냉랭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 땅의 성격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주위 조경이 잘못된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둘레에 있는 나무들이 너무 웃자라는 바람에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지 실제 지기는 안온하고 평안하며 심신을 이완시키는 환경심리적 작용력을 갖고 있는 곳이 분명하다.
젊은 병사들의 주검으로부터 받은 스산한 기분을 이곳에서 풀고 떠나는 것도 마음을 우울증에서 건지는 한 방법이리라.
[ 본사 객원편집위원 ]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내게는 그것이 오히려 호랑이가 숲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북쪽을 향해 튀어 나오려는 모양(猛虎出林形)으로 보였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특히 묘지가 조성되기 이전의 사진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수로터리에서 지하철 4호선 동작역 쪽으로 우뚝 솟았다가 한강에 머리를 디밀고 있는 형상이 그렇게 보이더라는 뜻이다.
조성 당시 대민 관계를 고려하여 가급적 민가나 마을이 없는 곳을 선정하였다고 하는데 실제 사진을 보니 초가집 몇 채만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 뒤로 우뚝한 봉우리가 툭 끊어지듯 한강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맹호출림에 역연한 형세였다.
이에 대해서는 지창룡씨도 동작봉의 백호세(위에 언급한 봉우리를 지칭함)가 기운 센 호랑이가 머리를 순하게 엎드리고 있는 모양새라고 언급한 바 있음을 밝혀 둔다.
자, 그렇다면 이곳은 명당인가?
아니다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우선 호랑이가 건너 뛰기에는 너무나 폭이 넓은 한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그런 형국에서는 큰 흠이 될 수밖에 없고, 게다가 요즘은 올림픽대로에 동작터널까지 뚫리는 바람에 호랑이는 그저 그림의 떡만 바라보게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곳이 공작이냐 호랑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국립묘지가 지니고 있는 장소의 상징성 때문에 명당이란 개념의 본질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 같다.
이곳에 모셔진 영령의 대다수는 젊은 사병들로서 후손을 두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음택풍수가 강조하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은 부모의 유골이 받은 땅기운(氣)이 자식에게 전해진다는 전제 위에 성립되는 풍수 이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동기감응론에 입각한 명당 길지 운운하는 것은 우선 사리에 맞지 않는다.
좀 심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하늘이 준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한이 맺혀 이승을 떠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오히려 스산한 초겨울에 이곳을 주로 찾는 이유가 이곳 땅기운의 양명치 못한 성격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이다.
명당이 무슨 소용에 닿겠느냐는 이유가 아니라 그 분들에게는 그 분들에게 맞는 땅이 명당이겠기에 오히려 풍수 이론상 명당 조건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 된 터잡기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이곳을 찾는 유가족들이 영령의 휴면에 공감하고 주변 경관에서 위로를 얻는 터이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소망인 바, 그 점에 있어서는 적절한 상지(相地), 즉 터잡기라고 보는 까닭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묘소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한 단봉 합장분으로 서향에 가깝다.
이 분은 친자는 두지 못했지만 양자가 있다.
따라서 호랑이 머리 쪽을 향하지 않은 것은 양자를 위하여 잘 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묘역의 제일 위쪽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육영수 여사의 쌍 분묘에 닿는다.
다른 묘와는 달리 이곳은 좋지 않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참배객이 여럿 눈에 띈다.
아직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시기상조인데다가 나 자신은 그의 치세를 썩 달갑게 여기는 쪽이 아니기 때문에 평가를 자제하기로 하거니와 어쨌든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던 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산소의 발복이나 음덕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은지 오래인지라 그저 소일거리 삼아 풍수적 소회를 약술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산-안산(案山)에 해당됨-이 남산이냐 아니면 바로 앞에 그야말로 공작의 알처럼 동동산으로 솟아오른 제1장군 묘역으로 보느냐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남산은 강 건너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안산이 될 수 없지만 대지(大地)에는 예외가 기승을 부리는 법이라 굳이 안될 까닭도 없다.
여하튼 남산 쪽은 멀리 북악과 북한산 연맥과 어우러져 무척 강인하고 강파른 인상을 주지만 제1장군 묘역을 안산이라 본다면 아주 안온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마치 지금 그에 대한 평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하지만 나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다"라는 식이 있는가 하면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군부 통치를 시발시킨 독재자"로 폄하하는 시각 또한 만만치 않은 만큼 땅이 그의 그런 평가를 수용하여 상반되는 해석을 낳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허망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어찌 되었거나 그런 생각 자체가 허망하고 허망할 뿐이다.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는 매우 흥미를 끄는,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전혀 끌지 못하는 서울시 유형문화재가 하나 있다.
조선 왕조 11대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 되는 창빈 안씨의 묘소가 그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선조는 조선조 임금들중 적손이 아닌 서손으로 대통을 이은 첫번째 왕이다.
잠깐 그 가계를 보면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연산군이 폐위된 뒤 왕위에 올랐다.
중종의 맏아들이 인종인데 임금에 오른지 8개월 만에 승하하여 후사가 없자 다시 중종의 둘째 아들인 명종이 재위를 잇게 된다.
하지만 명종 역시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뒤를 이은 것이 바로 이곳에 묻혀 있는 창빈 안씨와 중종 사이에서 난 일곱째 아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바로 선조인 것이다.
즉 창빈 안씨는 한미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으면서도 손자가 왕위에 오르는 영광을 얻은 셈인데, 물론 그녀는 손자가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런 사실을 알지는 못하였다.
서울 사직동 262번지에 있던 도정궁이 선조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며 후에 덕흥대원군의 사당을 모셨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기인 격암 남사고가 왕기(王氣)가 있음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서는 고종이 즉위함으로써 두번씩이나 왕을 배출한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 있을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은 명종의 동생이었는데 아들이 없던 명종이 덕흥의 세 아들을 불러놓고 임금만이 쓸 수 있는 익선관을 가리키며 "머리의 크고 작음을 알기 위함이니 차례로 한번씩 써보라"고 하자 선조의 위 두 형들은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하였으나 막내인 선조만이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하며 공손하게 받들어 제자리에 가져다 둠으로써 명종의 믿음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창빈 안씨가 별세한 것은 그녀 나이 51세 때인 명종 4년이었다.
처음 경기도 양주 땅 장흥에 모셨으나 다음해 이곳으로 옮겨 왔으니 그로부터 사람들이 이곳을 ''동작릉''이라 부름으로써 지금의 지명을 얻었다는 얘기도 있다.
내 보기에 이곳은 맹호가 숲을 뛰쳐 나가기 전 새끼를 감싸안고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라 가히 국립묘지 묘역 내에서 진혈(眞穴)이 이곳이 아닌가 짐작이 간다.
지금 이곳은 분위기가 음울하고 냉랭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 땅의 성격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주위 조경이 잘못된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특히 둘레에 있는 나무들이 너무 웃자라는 바람에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지 실제 지기는 안온하고 평안하며 심신을 이완시키는 환경심리적 작용력을 갖고 있는 곳이 분명하다.
젊은 병사들의 주검으로부터 받은 스산한 기분을 이곳에서 풀고 떠나는 것도 마음을 우울증에서 건지는 한 방법이리라.
[ 본사 객원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