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기업인들에게 어느 때보다 길고 험한 한해였다.

새 천년 첫해를 맞아 야심찬 계획으로 출발했지만 풀어야 할 숙제만 잔뜩 떠안은 채 해를 넘기게 됐다.

연말에는 내년 사업계획을 짜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을 겪었다.

연초에는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장밋빛 사업 계획을 잇달아 발표했다.

인터넷 바이오 등 신사업에 대한 관심도 컸다.

외환위기로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은 듯 했다.

정부 관료조차 ''IMF(국제통화기금) 졸업'' 운운하며 ''안정적 성장론''을 폈다.

이런 착시 현상은 냉혹한 현실을 왜곡시켰다.

아지랑이 같은 단꿈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곳곳에 널려 있는 지뢰들이 하나 둘씩 터지면서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인사를 둘러싼 잡음은 MK(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MH(정몽헌 현대 아산 회장) 형제간 갈등으로 증폭됐다.

이 와중에 현대투신 부실 문제가 불거졌다.

현대의 신용에 금이 가더니 이윽고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자본 시장을 강타했다.

대우의 멍에도 올 우리 경제를 주름지게 한 주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대우 계열사에 수십조원의 돈을 쏟아 붓고도 좀처럼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연초부터 시작한 대우차 매각 작업은 9월 포드의 대우차 인수 포기로 미궁으로 빠져 들고 대우차 공장은 다시 시동을 꺼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가동해도 손해고 세워도 문제인 대우차 처리는 결국 내년 과제로 넘어갔다.

자동차 문제로 골치를 앓기는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자동차는 지난 4월 프랑스 르노사에 매각됐지만 삼성생명 상장 지연으로 부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삼성과 채권단간 갈등을 빚었다.

기업 부문의 난제들과 금융 불안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경제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직접 금융시장이 제 기능을 못해 웬만한 신용 등급으로는 채권 발행조차 불가능했다.

벤처에 걸었던 ''대박의 꿈''도 산산이 부서졌다.

연초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던 창업 열기는 연말 최악의 연쇄 부도 가능성으로 급반전됐다.

벤처 기업은 생존을 위한 긴 싸움에 내몰렸다.

벤처의 거품이 꺼지면서 정현준 진승현씨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극한 상황을 맞고서야 벤처에 걸었던 무모한 기대를 반성하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대기업이든, 벤처기업이든 가시밭길을 걸어 오면서 얻은 교훈 또한 없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 내부거래조사나 국세청의 세무조사 못지 않게 무서운게 시장이란 사실이다.

투명한 경영은 실적 못지 않게 중요한 투자 척도가 됐다.

집중투표제 집단소송 등 지배구조개선을 위한 제도 도입에 대한 논란도 그래서 나왔다.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삼성은 1년 내내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재용씨 상속 문제로 참여연대의 공격을 받으며 시달려야 했다.

법과 도덕이라는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며 양측은 결론 없는 소모전을 벌였다.

기업 부문에서 빚어진 이런 혼란을 뒤로 하고 기업들은 잃어버린 희망을 찾기 위해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다.

이익원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