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계세요. /도련님.//지난 오월 단옷날,처음 만나던 날/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불 때/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춘향 유문)

눈빛 닿는 곳이면 어디서나 시의 꽃을 피워냈던 미당 서정주.

단옷날 그네 뛰던 춘향을 따라 "진달래 꽃비 오는 서천"으로 무사히 가 닿았을까.

이승에서 못다 이룬 집(未堂)을 지으러 눈발 날리는 동천(冬天)을 그토록 황망히 날아 올랐을까.

24일 타계한 미당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사람을 아우르며 서정시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 국민 시인.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전북 고창 선운사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60여년간 1천편의 절창을 토해내며 우리말의 멋과 맛을 완벽하게 살려냈다.

그는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원에 입학한 다음해(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동인지 "시인부락"을 이끌며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와 보들레르,니체 등 서구 철학의 자양분을 토속적인 우리시의 영역으로 재생시키기도 했다.

첫 시집 "화사집"(1941년)부터 90년대 "80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초기에는 원시적인 생명력을 독특한 관능미로 엮어냈다.

중기에는 "귀촉도""국화 옆에서""신라초"등의 전통적 정서에 탐닉했다.

고대 설화와 샤머니즘,노장사상까지 넘나들며 자신의 색깔을 뚜렷하게 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그는 "질마재 신화"의 고향 이미지 속으로 돌아가 "이야기 시"의 지평을 넓혔다.

후기에는 신화적 상상력의 뿌리를 지구 반대편까지 뻗어 유명한 산 이름으로 형상화한 "세계의 산시"로 새 면모를 보였다.

아내 방옥숙씨와 함께 "평생 우직하게 시만 써온 소"라고 자칭하던 그는 두달 전 "할망구 소"가 먼저 세상을 뜬 뒤 젊은 날의 싯귀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신이나 삼어줄 걸"(귀촉도)을 되뇌이며 힘없이 병상에 몸을 부렸다.

"아내 손톱/말쑥히 깎아주고,/난초/물 주고" 나서 "도로아미타불의/그득히 빛나는" 햇살 속으로 영생의 길을 떠난 시선(詩仙).

그의 시는 일제말기의 친일 활동이나 군부 지지 발언 때문에 얼룩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학사에서 그의 위치나 존재는 "전 시대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문학평론가 정과리)로 돌올하다.

그의 영면과 함께 20세기 한국 시문학 역사가 끝났다는 평가도 과언이 아니다.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

---------------------------------------------------------------

[ 연보 ]

*1915 전북 고창 출생
*1929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1930 광주학생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돼 구속
*1935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
*1936 시 "벽"(壁)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시동인지 "시인부락"발간
*1938 방옥숙과 결혼
*1941 첫 시집 "화사집"출간
*1952 조선대 교수
*1954 서라벌예대 교수
*1960 동국대 교수
*1968 제5시집 "동천"출간
*1975 제6시집 "질마재 신화"출간
*1977 한국문인협회이사장,세계일주 여행
*1981 미국 뉴저지의 "계간문학"지에 58편의 시가 번역 수록됨
*1986~89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일본어판 시집 발간
*1991 제13시집 "산시"출간
*1997 제15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