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초 한빛은행의 한 부서.

부서장이 전화를 받은 후 조용히 K대리를 부장실로 불렀다.

순간 부서내 직원들의 눈길이 모두 그 행원에 쏠렸다.

잠시후 상기된 얼굴로 나온 그는 간신히 인사말을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명예퇴직 대상자라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지난 6일자로 정규직원 8백80명과 계약직 2백10명을 명예퇴직시킨 한빛은행에서는 이런 장면이 부서와 지점에서 며칠간 반복적으로 벌어졌다.

명예퇴직 신청자가 당초 목표인원수에 못미치자 인사부가 퇴직대상자 명단을 부.점장에게 일일이 전해 퇴직신청을 받은 것이다.

L부장은 "내가 데리고 일하던 직원인데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더군요"라며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K대리는 L부장에게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떠나야겠죠"라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이 은행은 2차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당국에 내년까지 모두 1천5백명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한빛은행의 명예퇴직 대상자 이름을 적은 인사명령지만도 50쪽을 넘을 정도였다.

고용불안에 대한 공포감으로 뒤숭숭하기는 다른 은행도 마찬가지다.

외환은행도 노사합의에 따라 8백60명을 조만간 명예퇴직시킨다.

이번주 수요일까지 자발적인 신청을 받고 있는 이 은행도 적막감이 돌고 있다.

본점에서 근무하는 P차장은 "입행 동기나 같은 부서 직원끼리 모여 퇴직대상에 올랐는지 정보를 묻느라 정신이 없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점 직원은 그래도 나아요. 실적이 좋지 않은 지점에 있는 직원들은 자포자기 상태입니다. 벌써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행원도 많습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부부가 함께 외환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는 Y대리는 이번 명예퇴직에 부인이 신청키로 했다.

둘 중 하나가 그만 두는 것이 은행에도, 자신에게도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는 "부부중 한 명이 그만뒀으니 설마 나까지 나가라고 하겠어요"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처럼 이번 금융권의 2차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든 직장을 떠나야 하는 은행원은 3천여명 수준이다.

서울은행은 이미 6백50명을 명예퇴직시켰다.

앞으로 광주은행이 1백38명, 평화와 제주은행이 각각 73명과 35명을 줄일 예정이다.

조흥은행도 내년까지 2백여명을 자연감축할 예정이다.

은행권은 지난 98년 5개 은행이 청산되는 1차구조조정 과정에서 모두 4만여명이 일자리에서 떠났다.

2차구조조정은 규모면에서 이보다 적긴 하지만 줄이고 줄인 가운데서 또다시 인력을 감축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작용이 크다.

실제로 지난 9월 명예퇴직을 실시했던 서울은행의 경우도 퇴직대상으로 꼽힌 일부 직원들이 사직서를 못내겠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얼마 되지 않은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 금융구조조정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는 얘기다.

한 퇴직은행원은 "공적자금을 주기 위한 정부측의 명분쌓기에 은행원만 희생양이 된 셈"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인력구조조정이 여기서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도 어려운게 은행원들의 현실이다.

정부주도의 금융지주회사로 다시 묶이거나 우량은행간 합병이 성사된다면 또다시 고용감축의 칼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퇴직대상자가 한창 일할 나이인 30~40대 중간층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98년 1차구조조정때 상급자를 대거 내치고 신규직원은 채용하지 않은 탓에 줄일수 있는 인력이 중간층 뿐인 때문이다.

오직 은행원의 길만 걸었던 이들이 퇴직후 가계를 꾸려 나가기가 쉽지 않는 실정이다.

은행별로 재취업알선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고용창출을 기대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1차구조조정때 실직했던 은행원들 일부가 정부와 은행을 상대로 해고무효소송을 제기하는 등 여전히 힘겨운 고용쟁취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당장 자녀 학비부터가 문제일 겁니다. 1억원도 못되는 퇴직금으로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겠어요"

한빛은행의 P차장은 퇴직행원들의 심경을 이렇게 대변했다.

김준현 기자 kim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