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이후 한 푼의 달러가 아쉽던 지난 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첫 미국 방문에 앞서 신동아 계열사였던 대한생명이 미국의 세계적인 생명보험사인 메트로폴리탄과 10억달러의 외자유치 양해각서(MOU)를 맺었다는 대대적인 발표가 나왔다.

환란이후 최대규모의 외자유치여서 관심을 모았지만 몇달 뒤엔 "없던 일"이 돼버렸다.

작년 7월초 김 대통령의 2차 방미에 앞서 제일은행 매각협상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였다.

이기호 경제수석은 방미전에 협상타결을 강하게 시사했다.

방미 선물로 내놓으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뉴브리지는 다급해 하는 한국정부를 상대로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들고 나와 타결까지 석달을 더 보내야 했다.

조급증으로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다.

금감위는 작년 2월 서울은행 매각을 위해 HSBC(홍콩상하이은행)와 MOU를 맺었다.

당시 금감위 보도자료는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금융구조조정이 국제금융계에서 성공적으로 평가돼 해외투자자들의 한국 금융시장에 대한 인식과 시각이 긍정적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계기"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HSBC는 서울은행 실사 뒤 살 물건이 아니라고 보고 그해 8월말 협상을 깼다.

이런 사례를 되씹어 보면 해외매각이나 외자유치가 ''치적''으로 부각되고 MOU만 맺으면 다된 것처럼 여기는 관행을 확인할 수 있다.

''MOU 맹신증''인 셈이다.

대우자동차의 경우 포드와 MOU를 맺은게 아니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수준이었다.

이는 구속력 없는 제안서(Non-binding Offer) 수준이다.

포드는 바로 이런 상태에서 포기한 것이다.

국내 기업을 해외에 팔때마다 제기되는 ''국부유출'' ''헐값매각'' 등의 시비도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제일은행의 경우 "17조원을 쏟아붓고 불과 5천억원에 팔았다"는 비판이 단골메뉴다.

그러나 부실기업 매각시 ''부실비용''(Sunk Cost)을 감수하지 않으면 성사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제일은행이 문을 닫았으면 예금대지급과 기업부도로 인해 공적자금을 20조원 이상 쏟아부었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 단순하게 헐값 매각이라고 비판만 할 경우 협상당사자들이 설 땅을 잃는다는 것이다.

미국 드렉셀대 교수를 지낸 오갑수 금감원 부원장보는 "부실기업의 매각가격은 지금까지 들어간 돈이 아니라 미래 투자회수가치로 따져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우차 인수협상에 다시 나선 GM은 작년 초 한때 삼성차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GM의 실사팀이 삼성차 부산공장을 방문하려고 갔더니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 문앞에서 돌아섰다고 한다.

''지나친 관심''은 정부도 마찬가지다.

장관들은 ''잘되면 내 덕, 안되면 네(협상팀) 탓''으로 여긴다는게 실무자들의 지적이다.

전직 금감위원장은 포드의 제시가격을 공개해 말썽이 났고 현직 금감위원장은 GM이 대우차 인수의향을 밝혔다고 공개했다.

해외매각을 담당했던 공무원들은 "재경부장관, 금감위원장, 청와대 경제수석 등 적어도 3곳 이상에 진행상황을 보고해야 했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비밀은 새기 쉽다.

국제 딜의 최대 금기인 ''비밀준수합의''(Confidential Agreement)를 어기는 꼴이 된다.

대우차 매각을 주관하는 산업은행은 9일 보도자료에서 "앞으로 모든 협상내용을 최종계약서 서명때까지 비밀유지키로 합의했다"고 강조할 정도다.

대우차, 한보철강의 잇단 매각실패에 대해 김 대통령은 협상력 부재를 개탄했다.

비난여론이 거세 대통령의 입에서 문책하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문책론이 오히려 매각을 주관하는 공무원이나 채권단엔 족쇄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해외매각 실패에 대한 문책 움직임이 한국의 구조조정과 외국인 바이어들과의 주도적인 협상을 더 어렵게 하고 공무원들에겐 자리걱정을 하게할 것"이라고 지적한 점도 귀담아 들어야 할 때다.

오형규 기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