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에는 또 한명의 스타급 CEO의 몰락소식이 전해졌다.
이스트만코닥의 조지 피셔 회장(59)이 6개월후 CEO직에서 물러난다는 발표였다.
90년대 초반 휘청대던 모토로라를 전세계 셀룰러폰시장의 제왕자리에 올려놓아 "기적을 낳는 사나이"라는 명성에 빛났던 피셔회장의 중도하차였다.
피셔에게는 이날이 잊지못할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코닥에겐 아니었다.
코닥에서 "홈런"은 커녕 안타한번 제대로 못친 그의 사임발표는 낭보였다.
내리막길로 치닫던 코닥 주가는 급등세로 반전,피셔가 코닥에 필요없는 인물임을 확인시켰다.
약 7년 전인 93년 12월,코닥이 창업 1백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인사인 피셔를 CEO로 영입했을 때 월가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46달러이던 코닥 주가는 곧장 51달러로 수직상승,그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후 주가는 꾸준히 상승,96년말에는 94달러까지 올랐다.
경영호전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피셔 프리미엄''이 반영된 덕분이었다.
그는 그동안 이스트만케미컬 등 89억달러 상당의 비핵심사업부문 매각,2만여명의 인원감축으로 75억달러에 달하던 부채를 15억달러로 낮추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취임 4년째인 97년 들어 그의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성공적인 기술혁신과 구조개혁으로 신화를 창조할 것이란 기대감은 사라지고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해 하반기 들어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3·4분기 영업이익이 40% 이상 급락하는 등 영업부진이 표면화됐다.
일본후지필름의 저가공세로 안방인 미국시장에서 직격탄을 맞은 탓이었다.
이 때문에 세계 1위 필름업체의 위치마저 위태로워졌다.
획기적인 신제품 개발이란 경영전략도 여의치 않았다.
조직과 발전단계 위기상황이 판이한 코닥에도 모토로라식의 신제품출시 전략을 그대로 적용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이 문제였다.
브랜드 인지도를 내세워 97년 시장공략에 나선 디지털카메라 ''어드밴틱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일반필름 수요가 여전했던 당시 값비싼 디지털카메라는 시장성이 없었다.
결국 5억달러의 투자비만 날렸다.
시장을 제대로 못 읽어 소비자를 너무 앞서간 때문이었다.
반보만 앞서가야 성공한다는 ''시장 따라잡기''에 실패한 것이다.
불운도 겹쳤다.
97년 불어닥친 신흥시장의 경제위기로 전체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해외영업에서 죽을 쒔다.
급기야 98년말에는 8분기 연속 매출감소라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됐다.
다급해진 피셔는 독자노선을 버리고 인텔 AOL 등과의 제휴에 나서는 한편 중국시장 개척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한번 깨진 신뢰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시대흐름을 꿰뚫는 혜안이 부족한 CEO라는 낙제점을 받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