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경쟁력을 갉아먹은 이상한 시스템, 기수(kisu) 제도". 한국이 외환위기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던 1998년초 뉴욕타임스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한국의 한가지 진실-과거의 비즈니스 관행은 이제 그만(One Korean Certainty: No More Business as Usual)"이라는 충고성 제목이 붙은 이 기사에서 타임스는 한국 공직사회와 기업들이 고집해온 신입사원 공채제도를 외환위기의 원인중 하나로 지적했다.

특정기간을 정해 해당시기에만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거기에 ''기수''를 부여하는 공채제도.이것이 한국 기업사회에 배타적 순혈(純血)주의를 길러내는 온상이 됐다.

또 이는 다양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유연하고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게 기사의 골자였다.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하고라도 한국에서 일반적인 기업문화로 자리잡은 ''기수''제도를 마땅히 번역할 개념조차 없어 ''kisu''로 음역(音譯)해야 했던 나라가 미국이다.

다중(多衆)의 터전인 직장에서 순혈을 강조하는 기수제도는 처음부터 생각할 수 없도록 ''퓨전문화''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수''제도가 한국의 특이한 기업문화라면 ''헤드헌팅''은 미국을 원산지로 하는 시스템이다.

필요한 인력을 수시로 외부에서 스카우트해 충원하는 헤드헌팅은 최근 ''수시채용''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부분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한우물 파기''의 순혈주의가 한국 기업사회에서는 전통적인 미덕으로 치부되지만 미국에서는 적당한 직장 이동이 오히려 ''능력과시''의 징표다.

한국처럼 연공에 의한 자동적 급여 상승이 없는 미국에서 직장인들은 직장 이동을 ''몸값''을 올려받는 기회로 삼는다.

체이스맨해튼증권의 한국계 2세 브라이언 박(37)씨는 "대학졸업 후 무디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지금이 네번째 직장"이라며 "동료들 중 ''순혈 체이스맨''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특정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외부에서 스카우트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미국기업들은 ''토종''을 따지지 않는 만큼 최고경영자(CEO)도 내부 발탁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에 따라 외부 전문가를 과감하게 영입한다.

미국의 간판 백화점업체인 JC페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제임스 외스터라이커 현 회장이 은퇴의사를 밝힌 지난 98년 1월 ''CEO스카우트팀''을 발족했다.

회사 임원들 내부에서 "우리를 제쳐두고 왜 바깥에서 사람을 찾느냐"는 불만이 새나올 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스카우트팀은 무려 2년6개월 동안의 작업끝에 지난달 27일 마침내 적임자를 찾았다.

유통업체인 바니뉴욕의 앨런 퀘스트롬(60)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7월 40대 여성을 CEO로 영입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휴렛팩커드도 미국 기업사회의 ''퓨전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회사에선 공석이었던 CEO 자리를 놓고 내부 임원들간에 승진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이사회는 루슨트테크놀로지의 부사장으로 있던 칼리 피오리나(44)를 전격 발탁,업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기업들은 인사원칙을 누가 그 자리에 최적이냐를 따지는데 둔다.중간 간부건 CEO건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외부에서 수혈받는 게 당연한 문화로 정착돼 있다"

뉴욕시립 호프스트라대 이근석 경영학 교수의 말이다.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