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은 나를 버리러 가는 과정이다.

일상의 더께, 그 속 깊이 뿌리박은 아집(我執)의 굳은살을 벗겨내기 위한 의도적 방황이다.

산은 그러나 쉽지 않다.

섣부른 발걸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때론 감내하기 힘든 대가를 요구하며 꾸짖는다.

일상의 안락을 조롱하며 좌절과 포기를 강요한다.

아량과 포용, 산이 품고 있는 넉넉함의 미덕은 언제나 눈 앞에서 사라진다.

거기에 얻음이 있다.

한꺼풀 걷혀진 내면의 나와 대화.

그마저도 없어지는 순간 또다른 하늘이 트인다.

산이 거칠고 험할수록, 스스로가 지치고 힘들수록 그 울림의 폭은 크게 마련이다.

아리랑의 고장 강원 정선의 상정바위(해발 1천6m).

송천과 골지천 물이 모여 이룬 조양강 사행(蛇行)물길에 버티고 선 높은 산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물살에 깎인 문곡리 앞산이 한반도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다고 해서 이름났다.

문곡리 이장 신석희씨가 지난해 산나물을 캐러 올랐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알리기 시작한 뒤 산꾼들의 발길이 잦아진 곳이다.

왕복 5km.

평지라면 빠른 걸음으로 1시간 정도의 거리다.

그러나 초심자는 4~5시간은 잡아야 할 정도로 거칠고 가파르다.

상정바위 등산길은 처음부터 아집을 버리게 만들었다.

밑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 중앙을 한동안 걸어 만난 표지판의 화살표는 길 아닌 길을 향해 있었다.

길은 풀로 덮여 보이지 않았다.

(큰골쪽 하산길을 거슬러 올랐다)

눈앞의 뚜렷한 앞길에 대한 확신은 이내 의심으로 바뀌고 되돌아선 발길은 어느새 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랐다.

끊겼다 이어지곤 하는 어둡고 좁은 길은 내내 오르막.

얼굴에 닿아 뒤로 늘어지는 거미줄의 감촉이 오싹했다.

매미울음소리 조차 지독히 괴기스러웠다.

인적이라고는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산악회 리본과 돌무덤뿐.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30분도 안돼 숨은 턱에까지 차올랐다.

입에선 단내가 났다.

수건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다.

문명세계와의 유일한 연결끈인 휴대폰도 불통이었다.

머리속은 백지장처럼 텅비어 버렸다.

정상정복의 유혹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유혹은 욕망이 있을 때에만 생명력을 갖는 신기루 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되돌아서 아래를 향했던 발길을 돌렸다.

무엇인가 무작정 오르기로 결정해 준 것 같았다.

나무에 의지하지 않고는 오를수 없는 깔딱고개 벌떡고개가 원망스러웠다.

가빠진 호흡은 신경의 통제범위를 벗어난듯 싶었다.

두시간만에 만난 제1전망대.

아래로 펼쳐진 비경은 그 모든 고통을 보상해 주었다.

6겹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줄기.

조양강이 구불구불 감아도는 가운데의 문곡리 앞산은 틀림없는 한반도의 축소판이었다.

제2전망대 못지 않은 한반도 윤곽이 뚜렷했다.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상까지는 더 남았다.

철쭉군락지를 가르는 길은 그런대로 수월했다.

정상은 거대한 뾰족바위를 이고 있다.

독수리의 부리 처럼 당당했다.

온통 풀로 덮여 분간할 수 없었던 길을 뚫었다.

제1전망대에서 40분이 더 지난 뒤였다.

정상에서 본 문곡리 앞산의 한반도 형상은 또다른 맛을 풍겼다.

한층 장중한 기세로 다가왔다.

하산길은 작은골쪽으로 택했다.

내리막뿐인 하산길도 수월치는 않았다.

머리속에서는 묻고 있었다.

무엇을 버리고 또 무엇을 얻었는가.

고한읍의 천년고찰 태백산정암사를 향한 발길이 바빠졌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