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으면 했다.

한바탕 장대비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지난 주말 전남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을 향해 차에 오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여행의 불청객인 비를 기다리다니.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소리"에 대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3년전 처음 소쇄원을 찾았을 때 온몸에 부딪던 장마비의 감촉이 느껴졌다.

질척거려 불편하기는 했다.

그 불편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뜻밖에도 소리가 오래묵은 마음의 짐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굵은 빗방울은 댓잎과 뭇나무의 이파리를 내리쳤고 짧지만 깊은 계곡을 흰 포말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그들 소리는 한데 어울려 공명했다.

소쇄원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소리들은 뒷 소리와 겹쳐지며 증폭되는 듯 했다.

무섭도록 서늘했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정자 대봉대(待鳳臺) 옆에 내리앉으려는 봉황의 큰 날갯짓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에 괜히 몸이 떨렸었다.

비는 끝내 내리지 않았다.

그때의 소리에 젖기는 틀린 일이다.

소쇄원은 그러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예사로이 넘길수 없는 "뜻"(哲學)이 담겨 있다.

자연이 전하는 원시소리의 탁트임을 기대하기 힘든 만큼 그 뜻에 잠겨 예를 느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소쇄(瀟灑).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의 원림(園林)이다.

원림이란 말은 낯설다.

정원(庭園)이 익숙하다.

정원은 그러나 본래 일본말이다.

인위적 힘으로 조작한 단정한 앞마당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거기엔 자연의 "그러함"이 부족하다.

원림은 다르다.

자연에서 빌려오고(借景), 자연을 조금 변형시켜 다스리는(治景) 선조들의 자연주의 문화가 녹아 있다.

인공(人功)은 있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숨은 변형은 자연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공간미를 극대화시킨다.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 사람인 양산보(1503~1557)의 별서다.

담양일원 원림문화의 대표주자다.

집, 계곡과 연못, 돌과 화목, 다리 그리고 철학까지 원림의 구성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각각의 배치는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그 원리와 의미를 알기 위해선 양산보란 인물을 알아야 한다고 역사탐방연구회 염상균씨는 말한다.

양산보는 어릴적 조광조의 문하생.

조광조가 개혁을 위해 신진사류를 대거 등용시켰을 때 급제했다.

조광조는 그러나 그해 기묘사화에 휩쓸려 유배됐고 사약까지 받았다.

양산보도 그를 따라 낙향, 소쇄원을 짓고 은일자적했다.

소쇄원에는 그런 양산보의 못다 피운 뜻이 함축되어 있다.

봉황으로 비유되는 "성인군자"와 "태평성세"에의 염원이다.

양산보의 이야기는 입구쪽 대나무밭에서부터 풀린다.

60년이 돼야 꽃을 피운다는 대나무의 열매는 봉황의 먹이.

대봉대 옆의 오동나무는 봉황이 둥지를 튼다는 나무다.

대봉대는 양산보가 봉황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곳이라는 설명이다.

중심을 가르는 계곡 건너 제일 높은 곳에는 사랑채와 서재를 겸한 제월당(霽月堂)이 있다.

정철 송순 기대승 등 당대 인물들이 교류했던 곳이다.

계곡을 잇는 외나무다리는 스스로에게 건널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것 같다.

제월당 아래 대봉대 맞은편의 광풍각(光風閣)은 소쇄원의 중심.

계곡 물소리를 가장 잘 들을수 있는 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모든게 자연스럽다.

계곡의 물 흐름에 거슬림이 없다.

인력으로 놓은 다리며 정자까지 있어야 할 곳에 그렇게 서 있는 듯 했다.

소쇄원의 자연과 뜻은 그러나 갈수록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관리를 맡고 있는 양산보의 15대손 재영씨는 "예전의 맛과 멋을 찾을수 없다"며 한숨을 내쉰다.

개인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지키기엔 역부족이란 얘기다.

어깨 처진 그의 뒷모습은 우리의 문화수준을 소리없이 질타하는 것 같았다.

꼴사납게 서 있고 또 세워지고 있는 인근의 현대식 건물들을 보며 까닭없이 화가 치밀었다.

담양=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