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교수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 교수는 오늘날까지도 필자가 음으로 양으로 배우고 있는 분이다.

하이에크 교수와의 첫 만남은 1978년 9월13일 전경련이 교수를 초청했을 때였다.

3박4일 짧은 방한기간이었으나 필자와 얽힌 이야기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돌아갈 비행기의 연발로 그는 필자의 집에 6시간 머물렀다.

공개강연이 있던 날 오전엔 감기로 목이 막힌 교수를 병원으로 안내했다.

도착한 날 기침을 하기에 걱정이 되어 진찰받을 것을 권했으나 불응했다.

막상 강연하는 날 아침에도 목이 열리지 않으니 불안했던 모양이다.

"병원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마침 필자의 친구로 내과의사가 있었다.

서울대의대 교수로 심장외과 과장도 지낸 의사였다.

필자는 이 친구 의사를 믿고 전날부터 하이에크 교수에게 병원 진찰을 권했다.

진찰실에 들어서니 친구인 이동열 박사는 "구 텐 모르겐"하며 독일어로 환영했다.

물론 사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모시고 간다고 연락했다.

"이봐,당신같은 시골 풋내기 의사가 노벨상 수상자를 언제 진찰할 영광을 가질 수 있겠는가"

부탁하는 처지에 이런 농담을 건넸다.

하이에크 교수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모국어로 환영인사를 받게 되니 약간 놀라면서도 독일어로 답례했다.

이 간단한 독일어 인사로 이 박사는 하이에크 교수의 마음과 믿음을 꽉 잡은 셈이었다.

"환자의 믿음을 얻는 게 치료의 기본이다"

의학서 첫 페이지에 나오는 말이 떠올랐다.

하이에크 교수도 적이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진찰에 들어가기 전 교수는 여권을 펼쳤다.

여권 뒷장에 교수 건강검진 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이에크 교수는 심장병을 앓았다.

"지금도 약 복용중"이라는 게 쓰여 있었다.

치료나 약 처방에 있어서 유의사항도 적혀 있었다.

선진국 의료제도의 한 단면을 봤다.

이동열 박사는 청진기를 대보고는 "감기가 나아가는 상태이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병원을 나오면서 하이에크 교수가 필자에게 "어떻게 이 의사는 독일어를 아는가"라고 묻기에 "한국에서 2차 대전전까지 독일의학이 주류가 되다 보니 독일어는 필수였다. 해방 후 미국 의학으로 돌았다"라고 답했다.

한참 있다가 "그런데 이 박사와 저와는 생년월일이 같다.

동양 역학에 의하면 사주가 같다.

그러니 운수도 같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가지 큰 문제가 있다.

생일이 같다 보니 서로가 형이라고 한다"

하이에크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농담 반,진담 반을 주고받는 새 교수의 감기에 짓눌린 기분도 많이 달라졌다.

하이에크 교수의 명성을 처음 접한 것은 1958년.

필자가 런던대 정경대(LSE)에 다닐 때였다.

당시만 해도 LSE 는 영국 복지제도의 산실이고 노동당의 뿌리인 패비안(Fabian)사회주의의 총본산이었다.

지적 분위기는 사회주의가 압도하고 있었다.

이상과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었다.

LSE 학장은 옥스퍼드대학장을 지낸 W 베버리지경이었다.

그는 전후 "복지국가의 교본"이 된 "자유사회의 완전고용(Full Employment in a Free Society)"의 저자였다(1944년).

이 분이 실업률 4%미만을 완전고용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이를 유지하는 게 정부의 책임이라고 못박았다.

이를 받아 미국도 1948년 정부에 고용책임을 지우는 "완전고용법"을 제정했다.

본인도 LSE 에서 베버리지 학장의 "자유사회의 완전고용"이라는 강의를 들었다.

각종 클럽 소사이어티라는 숱한 학생 동아리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분이 하이에크 교수였다.

특히 이 분의 저서 "노예로 가는 길(Road to Serfdom)"은 좌우파 할 것없이 노동당 공산당 자유당 보수당 등 온갖 색깔의 정파에서 논쟁의 중심이 됐다.

< 김입삼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