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1년 12개월 중에서도 가장 기쁘고 경사스런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등으로 가족 모임이며 사은회 사친회 등 반가운 모임이 많고 소풍 학생들을 비롯해 상춘객들이 흘러 넘치며, 혼례가 연중 최다로 치러진다.

그런데 이 모든 행사는 의례 사진에 담겨, 두고두고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그러니 5월은 필름과 카메라, 사진 업계의 달이기도 하다.

사진업계 세계 선두주자는 단연 미국의 이스트만 코닥(Eastman Kodak Co)이다.

8만여명의 직원이 지난해 16조원의 매출을 올려 1조6천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싯가총액 21조원의 회사다.

최대 경쟁자, 일본의 후지포토필름이 97%의 매출로 바짝 추격중이지만 수익성과 호감도면에서 아직 우위를 지키고 있다.

이스트만 코닥은 뉴욕주 워터빌에서 태어난 조지 이스트만이 26세때인 1881년에 설립했다.

그는 보육원 운영을 중단하고 대학설립을 추진하던 아버지를 다섯살때 여읨에 따라 14세때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에 나섰다.

보험회사 사환으로 일하며 경리를 독학해 은행 창구직원이 됐고, 은행 직원으로 일하며 밤에 홀로 기술개발에 몰두해 코닥을 출범시켰다.

은행에서 일하던중 휴가를 같이 가 사진도 찍자는 동료 제의에 당시 사진을 찍으려면 트럭 한차분의 장비와 용액통들을 운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휴가를 포기하고 즉각 간편 사진기 개발에 매달렸다.

3년의 노력끝에 1880년 신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땄다.

그후 코닥은 더 작고 저렴하며 더 간편한 사진기와 필름을 내놓으며 지금까지 줄곧 세계 사진필름업계의 혁신자요, 선두주자로 달려왔다.

뭔가 강렬하고 인상깊은 사운드의 이름을 원했던 조지 이스트만은 격음, k로 시작해서 k로 끝나는 단어, "코닥"을 1888년 고안해 내 회사이름도 1892년 "이스트만"에서 "이스트만 코닥"으로 개칭했다.

1달러짜리 사진기를 내놓아 가난한 사람들도 행복한 순간을 간직할 수 있게 한 1900년, 당시 이미 코닥은 손색없는 다국적기업이었다.

이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한 백년을 지내 왔다.

그러나 97년초 대비 60% 수준으로 떨어진 최근 주가가 말해 주듯 코닥의 미래는 예측을 불허한다.

이른바 디지털혁명시대이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으로 필름이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66년 10만명을 돌파했던 인력규모는 30여년간 지속되다 몇년전 시작된 감량작업으로 최근에야 8만명 선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후지의 두배 가까이나 된다.

신수종(新樹種) 사업으로서 디지털 카메라며 1회용 카메라, 인터넷 사진서비스, 가정용 사진인쇄기 등 이것저것 손을 대 보지만 모두 경쟁이 너무나 치열하고 마진이 박해 실속이 없다.

21세기의 필름, 반도체를 만들지 않는 다음에는 언제나 죽쑤어 남 주는 꼴이다.

매출액 답보상태에서 몇년전부터 이익은 원가절감으로 창출되고 있다.

그러나 만의 하나 설혹 코닥 필름이 사라진다 해도 이스트만 코닥의 이름은 설립자, 이스트만으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중학교를 중퇴해야 했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항상 음악에서 힘을 얻으며 온화함을 잃지 않았고 장애인 누나를 위해 기꺼이 돈벌이에 나섰던 그였다.

역사에 길이 남을 극진한 효자였지만 사랑이 가족에 국한되지 않아 그야말로 박애를 실천했다.

재계 사상 처음으로 종업원지주제와 회사차원의 연금제를 실시했고,육영자선사업에 아낌없이 기부했다.

척추마비증에 걸려 32년 77세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하직했을 때도 전 재산을 대학에 기증하고 빈손으로 떠났다.

"근무시간중의 활동은 한 인간의 소유물을 결정한다 ; 여가시간중의 활동은 그 인간 자체를 결정한다"가 그의 평소 지론이었지만, 그는 실로 여가시간에 공부하고 실험함으로써 항상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코닥의 후계자들은 설립자 타계후 너무 일만 죽도록 해 시대변화를 좀 더 일찍 내다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전문위원 shindw@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