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성 작가 한강(30)씨의 두번째 창작집 "내 여자의 열매"(창작과 비평사)가 나왔다.

지난 96년 첫 단편집 "여수의 사랑"이후 5년만이다.

재작년 출간된 첫 장편 "검은 사슴"의 서장을 보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나는 님이 누군지 알 것만 같다(김형영의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한씨의 새 소설집은 "님이 누군지 알것 같음"에도 다시 반복되는 기다림의 끈질김을 이야기한다.

주인공들은 관처럼 비좁은 고시원 맨 끝방이나 소읍의 여관방에 갇혀있다.

그들은 온몸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남편이거나 팔뚝에 문신을 한 오뎅장수다.

누군가 남자들의 상처를 보고 다가왔다가 상처때문에 다시 떠난다.

그때 남자들은 가슴에서 칼을 꺼내 상대를 17번 난자한다.

샌드위치에 독약을 넣어서 먹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피흘리는 여자를 들처없고 응급실로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입에 손가락을 넣어 독약을 토하게 하고 잘못했다고 통곡하는 남자들.

이 어이없는 상황앞에서 독자들은 오히려 차분해진다.

기다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길이란 끝나는 법이 없으므로.끝이란 사람들이 지어낸 생각이기 때문"이다.

시인에 따르면 "대화는 서로 귀를 틀어 막은채 상대의 등뒤 벽을 향해 고함치는 행위"라고 한다.

한강의 소설은 관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깊고 무시무시한지 보여준다.

표제작 "내 여자의 열매"에서 외로운 아내는 아파트 베란다로 나가 나무가 된다.

남편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푸른 잎사귀를 단 식물로 변한다.

작가는 시적인 발상으로 여인의 욕망을 아름답게 형상화하지만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여자는 건강한 아이를 낳지 못하고 연두색 열매만 남긴채 말라죽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황종연씨는 "소통불가능한 관계를 다루는 한강의 소설엔 환멸의 세대가 온몸으로 익힌 비극적인 감각이 영롱하게 살아있다"고 말했다.

윤승아 기자 ah@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