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도 없이 농구경기 심판을 맡은 기분입니다. 게임의 규칙이 명확하지
않은데 선수들이 심판의 말을 듣겠습니까"

설 연휴기간동안 불법.탈법 선거운동에 대한 집중적인 단속을 벌였던 일선
선관위 관계자는 선거법 개정이 늦어지는 데 따른 어려움을 이렇게 호소했다.

실제 이번 연휴기간동안 전국 곳곳에서 기상천외한 방식의 선거운동이
많았다는 게 선관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우선 여론조사를 빙자해 "당신의 지역구에서 OOO, XXX가 낙천대상자 명단에
오른 사실을 아느냐"는 전화공세.

이는 명백한 사전선거운동으로 "선거법위반"이다.

또 통합이 예정된 선거구에서 인근 선거구의 현역의원들이 벌이는 선거운동.

이 또한 현재로선 선거법 위반이지만 개정선거법이 통과될 경우 없던 일로
돼버린다.

그러다 보니 일선 선관위에선 불법을 보고 단속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일종의 아노미(사회적 혼란)상태에 빠져 있다.

"선관위 단속에 저항하는 후보들도 늘고 있다"는 게 일선 선관위 관계자들의
하소연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관위에 엄격한 룰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기 위한 "룰"조차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단속의 문제뿐 만이 아니다.

선관위가 선거관리를 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선거관리규칙을 개정하고 1천여쪽에 이르는 예규를 전면 손질하는데만
최소한 1개월 이상 걸린다.

더구나 이번 총선엔 1인2표제와 석패율제, 그리고 시민단체의 선거운동
허용 등 유난히 새로운 규정이 많다.

유권자들과 후보들에게 선거절차와 관련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만도 시간이 태부족이다.

모든 스포츠엔 심판의 판정에 대한 시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공정한 룰이 있을 때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규칙이 있는 것은 심판의 자의적인 판단을 최소화하기 위한 도구다.

여야의 선거법 개정은 선거에서 이같은 룰을 정하기 위한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현재 진행되는 선거법 개정이 최선이냐 여부를 떠나서 또다시 늦어질 경우
이에따른 부담은 선관위의 몫이 아니라 결국 국민의 몫일 수밖에 없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16대 총선''은 벌써부터 상처투성이다

< 이의철 정치부 기자 eclee@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