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분 < 방송 작가 >

아는 글자라고는 "고"자 밖에 없는 세살짜리 조카가 있다.

신문에 난 내 사진을 보고는 큰일이라도 난듯 달려와 "여기 신문에 고모가
있어. 고모맞지? 여기봐. 이 밑에 이름이 "고...모"라고 적혀 있잖아"한다.

자기한테 고모라고, 신문에도 고모라고 적혀있다고 생각하는 귀여운 아이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는데, 나는
골프장의 아름다운 언덕들을 볼때마다 꼭 이 조카생각이 난다.

파란잔디와 오리가 떠있는 호수를 보여주면 얼마나 깡총깡총 뛰며 토끼처럼
좋아할까.

혼자 즐기기엔 너무 재미있는 골프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혼자 거닐기엔
너무 아까운 "골프장"이다.

골프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나역시 평생 밟아보지도 못했을 파란 언덕과
아름다운 클럽하우스.

그 골프장 풍경을 골프를 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함께 즐길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실 골프장은 골퍼들에게는 황송할 정도로 친절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배타적인 장소인것 같다.

골프장 근처에 살면서도 정문넘어 구비구비 펼쳐진 잔디구경을 한번도
못해보는 사람들이 많다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따뜻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한 골프장이 있다.

취재차 방문했던 골프장이었는데 클럽하우스 방방마다 중학생정도 되는
학생들이 있었다.

겨울에 휴장중인 시설을 그냥 놀리지 않고,아침 저녁으로 근방 마을에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도시락도 나눠주며 독서실로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밖으로 코스의 소나무들이 시원하게 펼쳐진 환상적인 독서실.

그곳에선 볼이 빨간 마을아이들과 유럽풍의 클럽 하우스가 어울려 따뜻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실 골프장이 인접한 곳은 요양원이나 장애복지 시설들이 유독 많다.

이 겨울, 골프장의 그 아름다운 풍경을 그들과 함께 나눌수 있다면...

또 봄날 하루쯤 우리조카처럼 어린 아이들이 들어와 맘껏 뛰어놀수
있다면...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골프코스가 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