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리(40)씨의 시집 "적멸의 즐거움"(문학동네)에는 서정과 비애, 적요와
폐허, 빛과 죽음의 이미지가 중첩돼 있다.

시인은 햇빛을 받아안으면서 그늘을 불러내고 폐사지의 달빛 속에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골라낸다.

첫 머리에 실린 "비오는 주막"부터 그의 시선은 한달음에 의식의 경계를
훌쩍 건너 뛴다.

"가뭇없이 비 듣는 영월 청령포"의 술청에 앉아 "몰운대, 맞은편 묏봉의
환한 산그늘"을 툭 건드리는 식이다.

그것은 "오체투지로 기어오르는 갈대잎 덤불"을 헤치고 적멸보궁을 찾아가는
표제작의 행로에도 집약돼 있다.

"위도 아래도 훌러덩 벗어 던지고/삐걱대는 맨 뼉다귀에 바람소리나 들이고
있는 저/적멸/(중략)/세상에 남루만큼 따뜻한 이웃 다시 없어라/몰골이 말이
아닌 두 탑신이/낮이나 밤이나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는데"("적멸의 즐거움
"부분) 그가 보여주는 "사랑의 길" 역시 "손 맞잡고, 두 눈 감아야 맡아지는
자운영 꽃향기"에서 시작되고 "가을밤 원앙금 차렵이불 같은/뭇별이 흘러오고
/은하수 여울목 숯덩이 같은 해가 떠내려"가는 틈새에서 승화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