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준의 골프백과] 미국 PGA 이야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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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가장 중요한 골프계의 발전은 나무(Hiclory) 샤프트가 강철(Steel)
로 바뀐 것이다.
스틸 샤프트의 탁월함은 프로골퍼들의 성적을 향상시켰고 일반골포들에게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장에서의 대량생산으로 클럽 가격이 내려가고 골프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 USGA는 스틸샤프트를 1926년에 승인했고 영국 R&A는
1929년에야 승인함으로써 모든 골프관계를 같이하던 두 기관의 의견이 다시
벌어졌다.
보비 존스는 1930년 그랜드 슬램을 히코리 샤프트 클럽으로 달성했다.
그러나 히코리 샤프트는 1936년 미국 US아마오픈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마지막으로 종식을 고한다.
1929년 네브라스카루 오마하, 그곳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우마차를 타고 US
오픈에 참가해 당대 세계골프계의 제일인자인 보비 존스를 첫라운드에서
물리쳐 화제를 일으킨 쟈니 굿먼이란 골퍼가 있었다.
그는 후에 US오픈 아마추어 챔피언십등에서 우승하며 당대최고의 아마추어로
불렸다.
그러나 결국은 그도 예외없이 19세의 신인 아마추어 로손 리틀(Lawson
Little, 1910~1968)에게 제거당한다.
뉴욕 근교 뉴포트 해변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로손은 중학교시절 그가
살던 마을 골프장 프로에게 골프를 배우며 골프장 일을 도왔다.
그리고 후에는 당대최고의 골프선생 토미 아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작은 키에 어깨가 넓고 팔이 길어 힘찬 스윙을 한 그는 당시에 장타자로
이름이 났으나 그의 장기는 그린주변에서의 숏게임이었다.
그는 쇼트게임에 필요한 여러개의 클럽을 가지고 다녔는데 어떤때는 311개의
많은 클럽을 가지고 출전했다.
골퍼들이 이렇게 많은 클럽을 가지고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위해
USGA는 1938년, R&A는 1939년에 14개의 클럽으로 제한하였다.
1934~1935년 세계 아마추어 골프는 로손이 군림하던 시대였다.
그는 보비 존스조차도 갖지 못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세계 최상급 골프대회를 31회 연속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1934년 US아마오픈과 브리티시 아마오픈을, 그 다음해도 같은 대회를
석권함으로써 세계 아마골프 제일인자임을 과시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골퍼중의 한명이다.
보비 존스 시대로부터 잭 니클로스의 등장까지 그를 능가하는 아마추어
골퍼는 없었다.
1936년 로손을 26세에 프로로 전향해 캐나다 오픈에서 우승한후 몇개
대회에서 더 우승한다.
그의 프로생활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40년 US오픈(캔터버리GC)에서
당대 골프계의 거장 진 사라젠과 72홀 동점을 이루고, 다음날 연장전에서
사라젠을 3타차로 제치고 우승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그는 보비 존스에게까지 비유됐던 아마추어 시절의 기량을
다시는 발휘하지 못했다.
훗날 그는 "너무 많은 언론의 보도와 팬들의 기대가 많은 부담감을 주었다"
고 말했다.
오늘날 극소수의 스포츠인을 대상으로 지나친 기대를 거는 우리사회도
로손의 사례를 거울삼아 보면 어떨까 한다.
< 전 미PGA 티칭프로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5일자 ).
로 바뀐 것이다.
스틸 샤프트의 탁월함은 프로골퍼들의 성적을 향상시켰고 일반골포들에게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장에서의 대량생산으로 클럽 가격이 내려가고 골프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그럼에도 불구, USGA는 스틸샤프트를 1926년에 승인했고 영국 R&A는
1929년에야 승인함으로써 모든 골프관계를 같이하던 두 기관의 의견이 다시
벌어졌다.
보비 존스는 1930년 그랜드 슬램을 히코리 샤프트 클럽으로 달성했다.
그러나 히코리 샤프트는 1936년 미국 US아마오픈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마지막으로 종식을 고한다.
1929년 네브라스카루 오마하, 그곳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우마차를 타고 US
오픈에 참가해 당대 세계골프계의 제일인자인 보비 존스를 첫라운드에서
물리쳐 화제를 일으킨 쟈니 굿먼이란 골퍼가 있었다.
그는 후에 US오픈 아마추어 챔피언십등에서 우승하며 당대최고의 아마추어로
불렸다.
그러나 결국은 그도 예외없이 19세의 신인 아마추어 로손 리틀(Lawson
Little, 1910~1968)에게 제거당한다.
뉴욕 근교 뉴포트 해변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로손은 중학교시절 그가
살던 마을 골프장 프로에게 골프를 배우며 골프장 일을 도왔다.
그리고 후에는 당대최고의 골프선생 토미 아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작은 키에 어깨가 넓고 팔이 길어 힘찬 스윙을 한 그는 당시에 장타자로
이름이 났으나 그의 장기는 그린주변에서의 숏게임이었다.
그는 쇼트게임에 필요한 여러개의 클럽을 가지고 다녔는데 어떤때는 311개의
많은 클럽을 가지고 출전했다.
골퍼들이 이렇게 많은 클럽을 가지고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위해
USGA는 1938년, R&A는 1939년에 14개의 클럽으로 제한하였다.
1934~1935년 세계 아마추어 골프는 로손이 군림하던 시대였다.
그는 보비 존스조차도 갖지 못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세계 최상급 골프대회를 31회 연속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1934년 US아마오픈과 브리티시 아마오픈을, 그 다음해도 같은 대회를
석권함으로써 세계 아마골프 제일인자임을 과시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골퍼중의 한명이다.
보비 존스 시대로부터 잭 니클로스의 등장까지 그를 능가하는 아마추어
골퍼는 없었다.
1936년 로손을 26세에 프로로 전향해 캐나다 오픈에서 우승한후 몇개
대회에서 더 우승한다.
그의 프로생활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40년 US오픈(캔터버리GC)에서
당대 골프계의 거장 진 사라젠과 72홀 동점을 이루고, 다음날 연장전에서
사라젠을 3타차로 제치고 우승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그는 보비 존스에게까지 비유됐던 아마추어 시절의 기량을
다시는 발휘하지 못했다.
훗날 그는 "너무 많은 언론의 보도와 팬들의 기대가 많은 부담감을 주었다"
고 말했다.
오늘날 극소수의 스포츠인을 대상으로 지나친 기대를 거는 우리사회도
로손의 사례를 거울삼아 보면 어떨까 한다.
< 전 미PGA 티칭프로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