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서울의 현실은 참담하다.

더이상 다스릴 수 없는 상처의 악취로 진동한다.

생활에 쫓긴 가장들은 내키지 않는 일에 내몰린다.

그나마 섣부른 헐뜯기와 조롱의 무게에 눌려 무기력증을 앓는다.

천민자본가의 번들거리는 눈빛은 끝모를 탐욕과 쾌락 사이를 오간다.

어린 딸들은 그 돈 앞에서 옷을 벗고 그 돈에 기댄 속빈 사내아이들은
의미없는 육욕의 늪에 빠져 흥청댄다.

모두들 즉흥적으로 커튼뒤 어둠에 숨어 벌거숭이로 뒤엉킨다.

고상한 자리와 사람들 마저 뒷거래의 시커먼 속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너도 나도 정색하고 제잘난 소리를 해댄다.

상실감에 허덕이는 이웃의 분노는 폭발직전이다.

급기야 넋나간 얼굴로 피까지 부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단절돼 이어 붙일 수 없는 지경이다.

영화 "세기말"은 "넘버3"(97년)의 송능한 감독이 그린 1999년 오늘 서울의
자화상이다.

"모라토리엄" "무도덕" "모럴 해저드" "Y2K"등 네개의 장에 각기 다른
처절한 삶의 조각을 주어 담았다.

각 장의 인물들은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지만 모두가 자신도 모르는 인연과
관계로 엮여진다.

그 이야기의 조각들을 모으면 장소만 다를뿐 지금 이순간 서울사람들의
우울한 현실이 하나의 벽화로 드러난다.

첫장은 "모라토리엄".

37살의 시나리오 작가 두섭(김갑수).

돈 때문에 멜로드라마를 쓰며 현실과 꿈 사이의 장벽을 실감한다.

여관방에서 시나리오를 써보려고 하지만 실마리를 풀지 못한다.

컴퓨터바이러스로 인해 가까스로 완성한 시나리오 마저 날아가 버린다.

두섭은 포기하고 쓰고 싶었던 것을 쓰겠다고 결심한다.

작업을 시작한 두섭은 여관방 근처에서 봤던 요요장난감을 파는 이상한
사내(안석환)의 살인소식을 접한다.

둘째장은 "무도덕".

55세 천민자본가 천(이호재)은 가난한 대학생 소령(이재은)과 원조교제를
한다.

소령은 오렌지족 현일과도 섹스와 마약을 한다.

돌고 돌아 다시 손에 쥐게 된 수표를 통해 현일이 천의 아들이란 사실을
안다.

어느날 차를 몰고 가던 현일과 소령은 요요사내와 사소한 시비를 벌이게
되고 요요사내는 현일을 살해한다.

셋째장은 "모럴 해저드".

37살의 시간강사 상우(차승원).

강단에서는 사회정의를 외치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하다.

교수 자리를 위해 돈을 써야하는 현실에 분노하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속물이다.

그의 바람기를 견디지 못한 아내의 고소로 체포된 상우는 결국 호송차에
오른다.

넷째장은 "Y2K".

두섭은 시나리오를 완성하지만 영화화에 실패한다.

생계를 위해 만화가게를 운영하며 또다른 시나리오를 위한 꿈을 꾼다.

영화에 담긴 오늘 서울의 삶은 이렇듯 슬프고 또 우습다.

카메라는 냉정하게 그 상처투성이의 얼굴들을 교차시킨다.

때론 순박하고 때론 거칠게 스케치한다.

감독은 그러나 절망속에서 새 희망을 엿본다.

그 희망은 그래도 버텨낸 사람에게 있지 않느냐고 역설한다.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다.

앞 이야기에 스친 인물이 뒷 이야기를 이끌고 뒷 이야기의 사건은 앞 인물의
모습을 설명한다.

10명에 가까운 주인공들의 비중을 안배해 균형을 잡았다.

김갑수 이재은 차승원 이호재 등 주연배우는 물론 조연들도 호연했다.

< 김재일 기자 kji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