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홍대앞의 시어터제로 극장에서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무대에
올랐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거짓말"의 상영여부가 논란인 가운데
연극으로 먼저 관객들을 찾아 세간의 화제가 됐다.

관심의 초점은 단연 "또 다른 벗기는 연극이가" 아니면 "표현영역에 대한
도전인가"에 쏠렸다.

개막 첫날부터 연일 극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말쑥한 정장차림의 3~40대
관객들도 이에 대한 궁금증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하재봉씨가 연출한 "내게..."는 이 두가지 논쟁을 모두
비켜가고 있었다.

그는 18세 여고생 와이(이지현)와 38세의 유부남 조각가 제이(오광록)의
사도-마조히즘적 성행위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관계과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핵심코드 삼았다.

따라서 남자 주인공 제이를 변태적 행위에 집착하게 하는 사회환경이 주요한
모티브.

하씨는 제이의 의식속에 자리한 사도-마조히즘이 육군 대위 출신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잉태되었음을 보여준다.

"숟가락을 직각으로 들어, 대답은 예 아니오, 말끝은 다. 까로만 해" 등
어려서부터 혹독한 억압과 몽둥이로 훈육당한 제이.

그가 와이를 성적으로 길들이는 방식은 놀랍게도 가장 혐오했던 아버지와
닮은꼴이다.

자신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 제이는 자기모멸에 사로잡혀 더욱더
파괴적 섹스에 몰입한다.

이쯤이면 벗기는 연극이라는 혐의에서는 어느정도 자유로워진다.

그렇다고 표현양식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극속에서 도드라지게 자리한 정치성은 은유의 여백을 모두 지워버렸다.

연출가는 군복차림의 아버지와 직설적으로 내뱉는 대사를 통해 폭압적
사회가 빚는 자아상실과 자기파괴를 전달하려 하지만 관객에게는 오히려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했다.

12월31일까지.

(02)338-9240

< 김형호 기자 chsan@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