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로부터 한살 한살 근근이 수확하는 나이를 평범에 갖다 바치다/
소작농이 그의 지주에게 으레 그리하듯/그러나 나의 나이여, 평범의 지주에게
갚는 빚이여, 지주의 눈을 피한 단 한 줌 이 손아귀 안의 움켜쥠을 허락해
주지 않으련"("평범에 바치다" 전문)

이선영(35)씨의 새 시집 "평범에 바치다"(문학과지성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는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들에 비범한 "성찰의 옷"을 입힌다.

단순한 사물도 각도를 달리하거나 뒤집어 보면 새롭다.

시인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 훌쩍 빠져나올 때, 세상은 더욱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

이번 시집의 옷 집 열쇠구멍 활자 등은 "몸"의 이미지에 닿아있다.

그의 "몸"은 미세한 입자로 떠돌다가 거대한 우주로 확장된다.

때로는 "목숨의 감옥"이나 "레지오넬라들의 좋은 은신처" "세월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그는 "헐렁한 옷 속에서 그동안 나는 속이는 일의 간편함, 세상에 나의
오목과 볼록을 드러내지 않는 일에 젖어 있''다가 어느 순간 "옷을
뒤집어본다, 내가 없다"며 스스로 빠져나온다.

그 경계의 접점에서 시인은 "내가 세상과 대적하여 어거지로 입었던
그 헐렁한 옷 속에서/독하게 꽃피워보지도 못한 나"의 열매를 밀어올린다.

그는 "메마른 종잇장들에 좀처럼 길들지 않으려는" 육체와 "고루 절여진
배춧잎"을 펼쳐놓고 "책장들이 다 훑어간, /글자들이 콕콕 찝어간, //내 영혼
/(중략)/번성하는 이 육체보다 늘 모자란/나의 독서"를 얘기한다.

십년째 교정을 보며 글자들을 의심하는 "몹쓸 재미"로 "직업병에 걸린"
그에게 글자들이 돋보기 쓰고 눈을 교정하겠다고 덤벼드는 "반전"도
눈부시다.

이를 통해 그는 "나가지 않는 개미 한 마리를 피하려다/내 마음의 단칸방
하나가 통째로 개미의 차지가 된다"는 평면치환과 "내 정수리 위에 떨어진
것은 방울이 아니라 차갑고 따끔한 우박"이라는 수직치환을 자유롭게
이뤄낸다.

"마늘 한 쪽이다 저 달은"으로 시작되는 "달", 첫머리의 "나에겐 그가
있다", "오, O-157" "63 비딩에 갇히다"도 가슴 시린 절창이다.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