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분 < 방송 작가 >

나는 분명 건방져 있었다.

내가 스스로 건방지다고 느낀 것은, 처음 머리 올리러간다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그분은 첫 필드행을 앞두고 전날밤 가방 꾸리는 설렘을 말했다.

티와 장갑을 차곡차곡 챙기고 볼을 꾸리며 클럽을 정성스레 닦아 가방을
싸는데, 마치 결혼전날 신혼여행 가방을 꾸릴 때처럼 두근거려 잠도 이룰 수
없더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잊고 지내던 내 첫 필드행 풍경이 떠올랐다.

첫 필드행 날짜를 잡아두고 나는 얼마나 맹연습을 해댔으며, 그 때문에
옆구리는 얼마나 저려왔던가.

필드에 도착해서는 어땠나...

초록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풍경에 입이 딱 벌어져 놀라면서도 산으로
올라가기만 하는 볼이 얼마나 당황스러웠던가.

동반자들의 조언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고, 코스를 척척
분석해내는 캐디가 존경스러워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순진함.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이리저리 헤매면서도 내 스윙으로 팬 잔디를 마음
아파하며 뛰어다니던 그 분주함.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분명 변했다.

타성에 젖은 골프가 된 것이다.

이제 내일 필드에 간다고 해서 그때처럼 옆구리 저리도록 칼을 갈지 않는다.

또 옛날처럼 일찍 도착해서 퍼팅연습을 해야한다는 조바심도 없다.

필드에 대한 긴장과 성실한 준비가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남의 탓까지 하는 버릇마저 생겼다.

얼마전 플레이.

핀까지 60야드 거리에서 캐디는 피칭웨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9번 아이언이 더 좋을텐데..."라고 말하며 피칭웨지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피칭웨지 샷이 그린에 턱없이 모자라자, 혼잣말처럼 속삭인건 잊고
"캐디언니가 8번 아이언을 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라며 은근히 캐디탓
을 했다.

사실은 일관성이 없는 내 샷이 문제인데 말이다.

첫 필드행에선 모든 미스샷의 원인을 다 "내가 잘못 친 탓"으로 여기더니
이제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까지 생기다니...

타성에 젖은듯한 요즘 나는 첫 필드행의 느낌이 다시 그리워졌다.

바쁘게 뛰어다니면서도 떨어져 나간 잔디에 미안해 하고 마지막 18번홀에서
는 몇홀 더 돌고싶어 아쉬워하던 그 정신없는 하루.

첫사랑의 기억은 지금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가끔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했던가.

첫 필드행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날의 가슴떨림을 반추한다면 이 가을, 타성에 젖은 내 골프는 분명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