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CEO 탐구] 강창희 <현대투자신탁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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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전주 출생(47년)
<> 서울사대부고(66년) 서울대 농경제학과(74년) 졸업
<> 일본 동지사대학 상학석사(84년)
<> 증권거래소(74~76년) 대우증권(77~98년) 근무
<> 대우증권 상무(리서치센타본부장.97~98년)
<> 방순옥씨와 1남1녀
<> 취미는 스크랩과 영화감상
-----------------------------------------------------------------------
강창희 현대투자신탁운용 대표(52)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성장산업으로 손꼽히는 자산운용업을 담당할 수 있게 됐다"는게 행운이라는
얘기다.
시대의 흐름은 은행예금에서 주식투자로, 그중에서도 간접투자로 자산운용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 패러다임시프트를 앞장서서 이끌수 있게 된 것은 26년간 "증권외길"을
걷는 동안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그의 위상을 보면 이런 말이 과장이 아님을 금세 알 수 있다.
강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손이다.
그가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주식형펀드는 현재 12조원에 달한다.
그중 "바이코리아펀드"가 10조원이다.
주식편입비율을 50%로 잡아도 5조원이상의 주식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주식시장이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주가 1,000시대"를 여는데 그와 "바이코리아"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으면 뭔가 뽐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강대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직도 부족한게 많다"며 겸손해 한다.
"주가 1,000은 IMF 위기로 폭락했던 주가가 정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주가가 크게 올랐기 때문에 펀드운용에도 어려움이 없었다"며
특별히 자랑할게 없단다.
"바이코리아"에 자금이 몰리고 있는데 대해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한자리수의 저금리에 따라 시중자금이 예금에서 주식쪽으로 옮겨오는
패러다임시프트의 결과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는 "투신사는 고객의 재산을 맡아 안정적인 수익을 올려주는게 가장
중요하다"며 "그런 쪽으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털어놓는다.
"주가 1,000시대에는 기업가치가 높은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에
주가차별화는 심화될 것이다. 그런 종목들을 얼마나 발굴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다. 지금까지는 오픈게임이었다면 이제부터가 메인게임이다. 승부는
지금부터다"라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현대투신은 "인하우스 리서치(In-House Research)"를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 주니어펀드매니저 8명을 뽑아 펀드매니저를 21명으로 늘렸다.
곧 30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강 대표는 80년대 후반 일본과 한국이 "버블"에 빠졌을 때 냉철한 분석을
하지 않은채 시류에 따라 "아시아시대"를 주장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
으로 남는다고 한다.
그때 일본투자자를 상대로 펀드를 많이 팔았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손해를
입히게 돼 가슴이 아프단다.
새로 맞은 "주가 1,000시대"도 유상증자를 통해 조달한 자금을 흥청망청
쓰면 그때의 잘못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많다고 강조한다.
"유상증자는 은행차입금보다 코스트가 높다"며 "주식시장에서 대량의
자금을 조달하고도 주식시장을 경시하는 회사와 경영자는 주식시장에서
보복당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하는 CEO(최고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취미가 스크랩일 정도로 자료를 많이 모은다.
틈틈이 모은 자료는 회사경영에는 물론 외부기고에 요긴하게 쓰인다.
그는 일본경제신문의 자매지인 니케이금융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84년부터 89년까지 일본 도쿄에서 생활한 덕에 증권업계에서 일본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중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지난 4월에는 "글로벌금융업시대의 증권.투신경영전략"이란 책을 출판했다.
강 대표는 지난 74년 증권거래소 공채1기로 입사하고 2년뒤 대우증권으로
옮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거래소에서 증권사로 옮기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증권사행을 택한 것은 시대변화의 앞에 서자는 각오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자산운용업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운" 때문이 아니라, 26년에
걸친 노력에 따른 것이다.
< 홍찬선 기자 hcs@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7일자 ).
<> 전북 전주 출생(47년)
<> 서울사대부고(66년) 서울대 농경제학과(74년) 졸업
<> 일본 동지사대학 상학석사(84년)
<> 증권거래소(74~76년) 대우증권(77~98년) 근무
<> 대우증권 상무(리서치센타본부장.97~98년)
<> 방순옥씨와 1남1녀
<> 취미는 스크랩과 영화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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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희 현대투자신탁운용 대표(52)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성장산업으로 손꼽히는 자산운용업을 담당할 수 있게 됐다"는게 행운이라는
얘기다.
시대의 흐름은 은행예금에서 주식투자로, 그중에서도 간접투자로 자산운용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 패러다임시프트를 앞장서서 이끌수 있게 된 것은 26년간 "증권외길"을
걷는 동안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그의 위상을 보면 이런 말이 과장이 아님을 금세 알 수 있다.
강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손이다.
그가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주식형펀드는 현재 12조원에 달한다.
그중 "바이코리아펀드"가 10조원이다.
주식편입비율을 50%로 잡아도 5조원이상의 주식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주식시장이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주가 1,000시대"를 여는데 그와 "바이코리아"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으면 뭔가 뽐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강대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직도 부족한게 많다"며 겸손해 한다.
"주가 1,000은 IMF 위기로 폭락했던 주가가 정상화된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주가가 크게 올랐기 때문에 펀드운용에도 어려움이 없었다"며
특별히 자랑할게 없단다.
"바이코리아"에 자금이 몰리고 있는데 대해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한자리수의 저금리에 따라 시중자금이 예금에서 주식쪽으로 옮겨오는
패러다임시프트의 결과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는 "투신사는 고객의 재산을 맡아 안정적인 수익을 올려주는게 가장
중요하다"며 "그런 쪽으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털어놓는다.
"주가 1,000시대에는 기업가치가 높은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에
주가차별화는 심화될 것이다. 그런 종목들을 얼마나 발굴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다. 지금까지는 오픈게임이었다면 이제부터가 메인게임이다. 승부는
지금부터다"라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현대투신은 "인하우스 리서치(In-House Research)"를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 주니어펀드매니저 8명을 뽑아 펀드매니저를 21명으로 늘렸다.
곧 30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강 대표는 80년대 후반 일본과 한국이 "버블"에 빠졌을 때 냉철한 분석을
하지 않은채 시류에 따라 "아시아시대"를 주장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
으로 남는다고 한다.
그때 일본투자자를 상대로 펀드를 많이 팔았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손해를
입히게 돼 가슴이 아프단다.
새로 맞은 "주가 1,000시대"도 유상증자를 통해 조달한 자금을 흥청망청
쓰면 그때의 잘못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많다고 강조한다.
"유상증자는 은행차입금보다 코스트가 높다"며 "주식시장에서 대량의
자금을 조달하고도 주식시장을 경시하는 회사와 경영자는 주식시장에서
보복당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하는 CEO(최고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취미가 스크랩일 정도로 자료를 많이 모은다.
틈틈이 모은 자료는 회사경영에는 물론 외부기고에 요긴하게 쓰인다.
그는 일본경제신문의 자매지인 니케이금융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84년부터 89년까지 일본 도쿄에서 생활한 덕에 증권업계에서 일본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중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지난 4월에는 "글로벌금융업시대의 증권.투신경영전략"이란 책을 출판했다.
강 대표는 지난 74년 증권거래소 공채1기로 입사하고 2년뒤 대우증권으로
옮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거래소에서 증권사로 옮기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증권사행을 택한 것은 시대변화의 앞에 서자는 각오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자산운용업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운" 때문이 아니라, 26년에
걸친 노력에 따른 것이다.
< 홍찬선 기자 hcs@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