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넘는 경찰공무원 생활에서 얻은 건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입니다. 순간적인 실수까지 처벌하는 무서운 경찰관보다는 친절과
부드러움으로 범죄를 예방하는 멋진 경찰아저씨로 남고 싶습니다"

30일로 33년 8개월간의 경찰공무원 생활을 마감하는 박태안 경감
(강동경찰서 경비계장.57).

그는 그 긴 시간동안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범죄없는 사회를 이룰 수 있다
는 믿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모든 경찰이 그렇듯 숱한 신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기억의 뇌리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지난 68년의 이른바 "1.21"사태다.

박경감은 68년 1월21일 오후 9시40분쯤 당시 종로경찰서 수사2계 소속 순경
으로 동료 정종수 경사(순직.당시 34)와 함께 종로구 자하문고개에 설치된
임시 초소에서 근무하다 31명의 무장공비와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작전 수행중인 특수대원"이라고만 말했으나 박경감은 전투복에 달린
대전차 지뢰와 옷자락사이로 드러난 총구를 보고 무장간첩임을 직감했다.

곧 바로 최규식 서장(순직.경무관 추서)에게 상황을 보고한 뒤 최대한 시간
을 끌었다.

박경감은 자신들을 뒤로한 채 청와대 쪽으로 내려가는 공비들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는 대열 후미에서 가던 124군 부대장 김춘식을 붙잡아 유도 3단의
실력으로 땅에 메다 꽂고는 포승을 채웠다.

때 마침 도착한 최 서장 일행과 무장공비간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박경감도 왼쪽 귀에 총상을 입는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김춘식 상좌를 생포한 그의 공로는 "일등공신"으로
기록되고도 남을만하다.

그러나 이런 그에게 사태 발생 29년이 지난 97년에야 경찰청으로부터
인헌무공훈장이 내려졌으니 그 감회는 실로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구 대륜고를 졸업하고 청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를 다니던 그는 지난
65년 대학 3년을 중퇴한 뒤 곧바로 경찰종합학교에 지원, 같은 해 4월
종로경찰서에 배치된다.

첫 부임지에서 1.21사태를 겪은 그는 이후 대부분의 경력을 교통분야에서
쌓아왔다.

70년 경사로 진급한 뒤 동대문경찰서와 강남 송파경찰서를 거쳐 92년
파주경찰서에서 보안과장으로 1년간 근무했다.

이후 고속도로순찰대 제1지구대장을 거쳐 마지막 근무지로 강동경찰서
경비계장에 부임했다.

박 경감이 정년을 앞두고 혼신의 힘을 쏟은 분야는 "친절한 경찰서"
만들기다.

지난 8월 한국경제신문을 방문했을 때 현관 경비에서 안내원에 이르기까지
직원들의 몸에 밴 친절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 겪은 "신선한 충격"을 강동경찰서 이길상 서장에게 보고했고
이는 "친절한 경찰서 만들기 운동"에 불을 지폈다.

민원인을 부모 형제처럼 대하는 "문턱낮추기"가 전개됐고 "독일병정"을
연상케 하는 정문보초는 민원인 "도우미"로 변신했다.

그는 "33년 공직 생활동안 친절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크나 큰 행복"이라면서 "한점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박경감은 큰 아들과 딸을 출가시키고 부인 신연옥(54)씨, 막내아들과 개포동
아파트에 살고 있다.

정년퇴직후에는 부모님 묘소를 돌본 뒤 부인과 국내 여행을 다니며 휴식을
취할 계획이다.

< 김동민 기자 gmkd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