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법칙이 지배하는 월가의 생리를 한마디로 설명할 때 흔히 동원되는
말이다.
월가의 유서 깊은 뱅커스트러스트은행이 요즘 영락없는 먹이감의 처지로
전락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독일의 도이체 방크를 비롯한 경쟁 은행들의 사냥감으로 거론되고 있어서다.
부실경영의 업보 때문임은 물론이다.
뱅커스트러스트는 지난 3.4분기에만 5억달러 가까운 적자를 낸 것으로
발표됐다.
은행측은 막대한 적자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이머징마켓 붕괴에 따른 투자손실과 아시아 한파로 인한 기업금융 부문
에서의 영업차질이 겹쳐 이런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두 가지 요인이 다 불가항력적인 외생변수 탓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융가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아는 전문가들은 다른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국제금융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 우물 안 경영에 안주한 결과라는 것이다.
심하게 혹평하는 사람들은 뱅커스 트러스트가 부실의 핑곗거리로 삼고 있는
아시아 금융기관들과 다를 바 없이 시대착오적인 경영을 해 왔다는 비판까지
서슴지 않는다.
특히 이머징 마켓에서 구사해 온 영업전략은 한 판의 도박을 방불케 했다는
지적이다.
체이스맨해튼 시티 등 선발 대형은행들과 이들 지역에서의 세 불리기
경쟁에 집착한 나머지 무모한 투자를 일삼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뱅커스 트러스트는 1년여 전까지 인도네시아 기업들과 투기성이
높은 통화 스와프 거래를 20여건이나, 그것도 만기 3년 이상짜리의 장기계약
으로 하는 배짱을 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었다.
이 정도는 그나마 약과다.
올 초에는 러시아에서의 마켓셰어 불리기에 혈안이 된 나머지 러시아
재무부 채권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그 중에는 경쟁은행인 체이스 맨해튼이 따 낸 물량을 더 싼 값을 내세워
가로 챈 것도 적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러시아 경제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무려 1억5천만달러 어치를
매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뱅커스트러스트는 기업금융 부문에서도 이런 식의 무모한 경영을 했다.
고수익에 혈안이 돼 우량기업들보다는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부실 기업들을
상대로 한 고리대출에 치중해 왔다는 것이다.
이 은행의 더 큰 문제점은 이처럼 위험성이 큰 공격적 영업에 필수불가결한
리스크 관리마저 소홀히 했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가 러시아 등 이머징 마켓에 대한 영업관리다.
문제가 도질 대로 도진 올 봄 들어서야 각 사업부에 대한 리스크 진단을
한다고 법석을 떨었을 정도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뱅커스트러스트가 안고 있는 이런 경영상의 문제점들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4년전 취임한 프랭크 뉴먼 현 회장 체제 이후 더
심화됐다는 점이다.
클린턴 1기 행정부에서 재무차관보를 지낸 뉴먼은 뱅커스트러스트가 파생
금융 상품에 대한 거액의 손실로 도산 일보 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던 당시
영입된 전문 관료였다.
그러나 워싱턴 엘리트주의에 젖어 있던 뉴먼은 이머징 마켓과 고수익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위험천만한 투자를 밀어 붙였다.
적자 투성이의 은행을 조기회생시켰다는 평판을 얻기 위한 공명심이 오히려
화를 증폭시킨 것이다.
뉴먼 회장은 은행이 이처럼 깊은 골병을 앓고 있는 와중에서도 취임 이후
2년동안 1천9백만달러의 연봉을 챙겼다.
그런가 하면 얼마전에는 런던의 고급 호텔에서 초호화 컨퍼런스를 개최해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최고 경영자가 한낱 귀족취향에 젖은채 단기 업적주의에 탐닉할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 지를 요즘의 뱅커스트러스트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인원감축과 통폐합 등 일련의 구조개혁을
통해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왜 "정석경영"을 해야
하는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