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10월30일 밤 9시55분.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일행이 머물고 있는 북한 최고의 영빈관 "백화원
초대소"가 갑자기 술렁거렸다.

초대소에 근무하는 일꾼들이 복도에 나와 부산하게 움직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문한다는 전갈이 왔기 때문이었다.

현대 방북단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45분간의 김정일 면담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

< 편집자 >

----------------------------------------------------------------------

귀경전 마지막 밤.

밤 10시가 다 되도록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 일정을 통보받지
못해 초조할대로 초조해진 현대 방북단 일행이 김 위원장이 정 명예회장을
만나러 초대소로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것은 밤 9시55분께.

일행은 "이제 됐구나" 싶었다.

김 위원장의 집무실로 직접 찾아가야 될 줄만 알고있던 일행에게는 전혀
뜻밖이었다.

이미 밤이 늦어 넥타이를 풀고 있던 현대 방북단 일행은 급히 옷을
갈아입고 대기했다.

밤10시15분께 정 명예회장, 정몽헌 회장, 김영주 회장, 정희영 여사,
김윤규 사장, 이익치 사장, 우시언 이사 등 일행은 초대소 입구의 면담장으로
향했다.

정 명예회장 방에서 초대소 입구까지는 약 2백m.

정 명예회장은 김 사장의 팔부축을 받으며 10여분을 걸어갔다.

북측 안내원은 정 명예회장 부자, 김 회장 부부 등 네사람을 가리키며
"이분들만 들어가시는게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김용순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송호경
부위원장을 대동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 위원장이 먼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일행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김 위원장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에 명예회장 선생께서 연로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직접왔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중앙 소파에 앉고 정 명예회장이 오른쪽에, 몽헌 회장이
왼쪽에 자리잡았다.

정 명예회장과 김 위원장간의 "담화"가 시작됐다.

두 사람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오랜 "동지"를 만난 듯 활기찬 대화를
이어갔다.

김 위원장은 정 명예회장을 "명예회장 선생"으로 호칭했고 정 명예회장은
김 위원장을 "장군"이라고 불러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얘기는 주로 정 명예회장과 김 위원장간에 오갔고 몽헌 회장이 서해안공단
개발 유전개발 등 실무적인 사항에 대해 약간씩 거들었다.

김 위원장은 먼저 "원로 창업자중에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명예회장 선생을
만나게돼 영광입니다.

명예회장 선생이 황소같은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민족이 모두 잘 되도록 해나갑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정 명예회장에게 한국 최고 기업인에 대한 존경과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표시했으며 목소리는 놀랄만큼 우렁차고 컸다.

귀가 잘 안들려 평소에 배석자의 도움을 받곤 했던 정 명예회장은
김 위원장의 목소리가 매우 큰데다 그토록 면담을 애썼던 김 위원장을 만난
기쁨으로 대화 의욕이 솟구쳤고 몽헌 회장 등 옆사람들의 도움없이 특유의
박력으로 대화를 풀어나갔다.

김 국방위원장이 김 아태위원장에게 "금강산 관광이 기대보다 늦어집니다"고
말하자 김 아태위원장은 "예정보다 늦었지만 곧 실현될 것같습니다"고
답했다.

몽헌 회장도 "예정보다 늦었지만 모든 분들이 협조해줘 11월중에는 실현될
것 같습니다"고 거들었다.

김 위원장이 "금강산 관광사업은 현대가 모든 것을 맡아 적극적으로 해주면
고맙겠습니다"고 말했다.

순간 정 명예회장은 금강산관광.개발사업에 관한한 북측과의 조율 차원의
일은 모두 끝났다고 확신했다.

앞으로 남은 일은 사업 시행뿐이라고 생각한 정 명예회장은 "금강산에
호텔을 짓겠습니다.

또 온정리에는 온천을 개발하겠습니다"고 화답했다.

유전개발로 화제가 옮겨갔다.

정 명예회장이 "석유가 많이 묻혀 있다는데 남한까지 파이프라인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공화국에서 석유가 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다른데 하고 할 것 있습니까.

현대하고 하면 되지요.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고 덧붙였다.

몽헌 회장이 나서 "장군님, 관광사업뿐 아니라 서해안에 공단사업도 하려고
합니다.

경제특구가 좋을 것 같은데 도와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몽헌 회장은 "남북 경제교류에 도움이 되고 남북 모두에 이익이 된다"며
공단조성 외에도 8대 경협사업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김 국방위원장은 "잘되도록 하십시오"라고 김 아태위원장에게 당부했다.

김 국방위원장과 정 명예회장 일행은 체육교류도 적극적으로 해보자는데
뜻을 함께했다.

정 명예회장은 "평양에 실내 체육관을 짓고 남과 북이 오가면서 경기하면
민족화합과 단결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면담이 끝난 뒤 양측은 초대소 입구에 걸려 있는 대형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파도가 힘차게 몰아치는 총석정을 그린 그림이었다.

김 위원장은 첫번째 촬영이 끝나자 "나이가 많으신 분이 중간에 서셔야
합니다"며 정 명예회장을 중간에 세우고 자신은 정 명예회장의 오른쪽에,
몽헌 회장을 왼쪽에 세웠다.

시종일관 깍듯했던 김 국방위원장의 제안에 정 명예회장은 당황했지만
한편 뿌듯함과 고마움을 감출수 없었다.

몇차례 사양과 권유가 오가고 결국 정 명예회장을 가운데 두고 몇장의
사진촬영이 이어졌다.

시계는 밤11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떠날 걸음을 준비하던 김 국방위원장
은 "언제 또 오실겁니까.

길을 터놨으니 자주 오십시오"라고 환송의 말을 건넸다.

정 명예회장은 "석유를 주시면 언제든지 오겠습니다.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는 말로 이별사를 대신했다.

< 김정호 기자 jhki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