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들이 죄인을 조사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 있다.

우선 인상이 험악하고 말씨도 곱지 못한 "악질 형사"가 먼저 나선다.

욕이나 공갈 협박은 물론,심지어는 구타까지 해가며 혐의자가 복수심에
불탈 정도로 심하게 다룬다.

그리고 나서는 인상 좋고 말씨도 부드러운 이른바 "좋은 형사"가 나타난다.

좋은 형사는 "아까 그 친구(악질 형사)는 원래 그러니까 나하고 얘기나
하자"며 달랜다.

그러면 혐의자는 순순히 스스로의 잘못을 털어놓는다.

이른바 "악질 형사와 좋은 형사(good cop bad cop)전략"이 그것이다.

최근 미국이 한국에 대해 취한 일련의 정책을 들여다보면 바로 이 전략을
자주 구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1백80억달러를 출자하며
이를 기화로 한국에 들이 댄 비수다.

미국 의회는 지난주말 5천억 달러에 달하는 내년도 예산안에 합의하며
IMF에 대한 출자(1백80억달러)도 함께 포함시켜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경쟁상태에 있는 한국의 반도체 철강 자동차 섬유
조선등 5대 산업을 지목, IMF 자금이 이들 산업에 지원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부대조건을 달았다.

마이크론이라는 반도체회사를 필두로 "한국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업자들의 집요한 로비와 11월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의원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한국을 뭇매질하고 나온 것이다.

업자들과 의회의원들이 이른바 "악질 형사"의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워싱턴 한국대사관이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좋은 형사"
역할을 맡은 미국 재무부가 나선다.

"업자와 의원들은 명분이고 뭐고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또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이어서 물러 설 것 같지도 않다.

더욱이 한국은 IMF에서 빼낼 돈은 이미 다 빼내고 아직 뽑아내지 못한
돈은 30억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이 이번 법안에 거론되더라도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

그러니 다소 억울하더라도 한국이 한발짝 양보하는 것이 어떠냐..."

좋은 형사 재무부의 그럴듯한 입담에 "빚진 죄인"인 한국은 그대로
넘어가고 만다.

악질 형사와 좋은 형사가 노리는 것은 혐의자의 고백이고,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회와 재무부는 한국을 상대로 "짜고 친 고스톱" 한판을 벌인 것이다.

IMF개혁론을 들고 나온 미국의 주된 주장과 명분은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를 차단하자는 것이었다.

"IMF가 사기꾼들에게 마구 돈을 던져 주었다"는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의
발언이 이를 대변한다.

따라서 미 의회가 IMF 개혁론을 들고 나온 동기가 순수한 것이었다면
이번 예산법 속에 포함된 주요 비난표적은 러시아와 인도네시아였어야 한다.

한국이어야할 까닭이 없다.

한국이야말로 미국과 IMF가 하자는 대로 따라하고 있는 나라다.

그 결과 수백만명이 부도와 실업의 고통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는 것은 냉전붕괴이후 글로벌
리더십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이 IMF출자조건으로 한국산업에 대한 경계심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은 세계가 왜 글로벌 리더십의 부재를 안타까와 하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미국은 부인하려 들겠지만 결국 미국이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자국이기주의였음이 드러났다.

다만 그 내용이 IMF개혁론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미국인들은 지분을 중시한다.

소수지분의 권익보호를 주장하며 선경그룹의 SK텔레콤에 대한 영향력행사에
강력하게 저항해 온 것은 다름 아닌 타이거 펀드등 미국계였다.

서방세계 특히 프랑스는 "IMF의 진정한 개혁은 미국이 지분(18%)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데서 부터 출발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한국인들은 이제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