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여권 분량의 조선왕조실록을 CD롬으로 담아 세간의 화제가 됐던
(주)서울시스템.

이 회사가 IMF 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부도를 내고 말았다.

지난 85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했던 이웅근(70)
회장.

인생의 황혼기에 조선왕조실록의 CD롬화에 성공한 그는 이제 채권자들을
피해다녀야 하는 곤경에 빠져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특히 학계및 문화계는 "국가가 해야 할 문화정보사업을 이회장이 대신해오다
자금난에 봉착한 만큼 어떻게든 이 회사를 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사실 조선왕조실록 CD롬개발에 그가 쏟은 정열은 대단했다.

주위에서 수익성이 없다고 만류하기도 했지만 그는 국가가 하지 않으면
개인이라도 해야할 뜻깊은 사업이라며 밀고 나갔다.

한국의 역사를 전세계에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보람찬 사업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돈은 물론 사재까지 보탰을 정도였다.

투자규모를 보면 입이 벌어진다.

5년동안 무려 50억원을 쏟아부었다.

연인원 12만명이 동원됐다.

전국 각대학의 석.박사과정에 있는 2백명의 연구원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이 작업을 위해 들어간 교정지만도 A4용지 1백만장.

이렇게 해서 기적이 태어났던 것.

이 CD롬이 나오자마자 국내는 물론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제임스 B 루이스 옥스포드대 동양학연구소 교수가 "외국학자들에게
이 CD롬이 얼마나 유용한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며 "가히 혁명적인
걸작"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현재 옥스포드대를 비롯 하버드 워싱턴주립대 등에서 이 CD롬은 동양학
연구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대작도 경기불황 앞에서는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불법 복제품이 판치는 풍토의 국내시장에서 정품은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심지어 출판계조차 이 CD롬 정품을 구입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수요자들이 이처럼 정품보다는 불법복제품을 이용함으로써 서울시스템은
경영난에 직면하게 됐다.

서울시스템은 서체 개발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이 회사는 일본산에 잠식당했던 한글서체시장을 평정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본 중국 등에 서체를 수출까지 할 정도로 세계적수준의 서체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10여년동안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서체를 전문적으로 개발해 온
업체이기도 하다.

서체는 각기 다른 언어로 된 다양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로 관리할 때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이 회사가 현재까지 개발한 서체는 수백종에 이르며 자수로는 5천만자가
넘는다.

한자 서체분야에서도 중국 일본을 통틀어 독보적인 수준이다.

이 회사가 개발한 한자서체 프로그램에는 모두 7만자가 넘는 자수가
들어있다.

반면 중국이나 일본에서 발간된 대사전들 중에는 수록된 한자가 6만자를
초과하는 것이 없다.

서울시스템이 개발한 서체는 출판계에서 특히 많이 활용했다.

하지만 IMF한파는 출판계를 강타했고 그 여파는 서울시스템에 닥쳤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3백명이었던 개발인력중 50명만이 남아있다.

이 회장은 "부도난 회사의 경영자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성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은 "국민기업이라 할 수 있는 이 회사가
사라진다면 한국학 분야는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갖기 힘들 것"이라며
"정부차원의 지원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 류성 기자 sta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