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이나 역임한 원내 최다선(9선) 의원이다.
자유당 시절 조병옥 박사 비서를 지낸 신임 박 의장은 지난 60년 4.19직후
치러진 5대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된 이래 11,12대를 제외하곤 내리
당선됐다.
그는 4.19직후 김영삼의원 등 민주당 구파 소장의원들과 함께 청조회를
결성, 정풍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5.16이후 김종필씨의 손에 이끌려
공화당으로 말을 갈아탔다.
79년에는 공화당의장서리를 역임하면서 김영삼 신민당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도 했다.
박 의장은 80년 5.17 직후에는 정치규제에 묶여 미국에서 6년간 정치낭인
생활을 하다 같은 T.K(대구.경북) 출신인 노태우 전대통령이 만든 민주화합
추진위 참여를 계기로 정치일선에 복귀했다.
87년 대선때는 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상도동캠프에 한쪽 발을 들여놓았다가
돌연 노태우 후보 지원에 나서 상도동측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후 88년에는 다시 집권 민정당 공천으로 13대 국회에 복귀하면서 당대표
위원을 맡았고, 3당통합을 앞두고 "민정당 간판을 내릴 수도 있다"는 발언
으로 파문을 일으켜 박태준씨에게 대표직을 인계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권토중래끝에 곧 재기, 13대 후반기와 14대 전반기에 걸쳐
국회의장을 연임했으나 김영삼 정부 출범직후 재산공개 파문에 휩싸여 팽
당하고 만다.
박 의장은 지난 94년 문민정부 실세들에게 밀려난 JP와 함께 자민련을
창당, 동지애를 과시했으나 공천권 배분과 위천공단 문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JP와 결별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는 97년말 야권의 대통령후보 단일화 합의 이전부터 당내 반발을 무릅
쓰고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주도적으로 나서 김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 김형배 기자 khb@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