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부실 판정작업은 그야말로 피말리는 작업이었다.

지난 5월10일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부실대기업 퇴출을 천명한 후
불과 한달만에 후다닥 해치우다 보니 은행실무자들은 거의 실신할 지경으로
고된 작업을 해야했다.

판정대상 기업들도 금융가에 안테나를 맞춘채 길고긴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부실판정위원회 구성초기 일부은행에선 여신라인에 있던 직원들이
판정작업에 끼지 않겠다고 물러서는 바람에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애를
먹었다.

직원들은 "기업 죽이는 작업을 왜 내가 해야 하느냐"는 태도를 보였다는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반면 판정작업을 맡았던 뱅커중엔 새벽에 집에 들어가 옷만 갈아입고 출근
하는 성실파도 있었다.

판정기간중 은행들은 부실판정 정보가 외부에 유출될 것에 대비, 해당부서에
청경을 배치하는 등 보안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정부의 강력한 지시로 퇴출기업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은행들은
한밤중에도 기업부실판정위원회를 여는 등 난리법썩을 떨었다.

은행들은 형식요건상 구색을 맞추기 위해 외부위원들을 소집해야 했으나
위원들간 일정이 맞지 않아 곤욕을 치뤘다는 후문.

회의는 보통 3-4시간씩 열띤 분위기속에 진행됐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신용평가기관 관계자 회계사 등으로 구성된 외부위원들은 회의에 한번
참가할 때마다 50만원-70만원정도씩의 거마비로 받았다고.

<>.판정위원회에서 외부위원들은 대부분 부실징후기업및 협조융자기업에
대해 퇴출판정을 내릴 정도로 까다로웠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일부 외부인사들의 경우 향후 책임을 덜기 위해서도
퇴출쪽에 손을 드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

그러나 다른 관계자는 "한국신용평가 등에서 나온 외부위원들은 은행
실무자들보다 기업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은행중에선 부실한 것으로 알려진 은행들이 기업 부실판정에 엄격했다고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

S은행, D은행 등은 웬만한 기업에 대해서도 퇴출판정을 내려 주채권은행들
을 당혹케 만들었다고.

한 관계자는 "부실은행의 입장에선 객관적으로, 투명성있게 여신심사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선 주거래관계에 있지 않다고 해서 부실은행들이 마구잡이로
퇴출판정을 내렸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은행들은 당초 5대그룹 계열사에 대해 그룹당 두개씩 퇴출시키기로
방침을 정했으나 16일저녁 금융감독위원회가 갑자기 4개로 늘리라고 주문
했다는 후문.

금감위는 이날 오전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은행
장악력이 부족하다"고 질타하자 퇴출기업을 늘리라고 세게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는 것.

이에따라 은행들은 일단 대우를 제외한 4개그룹당 4개씩의 퇴출 계열사를
찾아내고 대우의 경우 "큰 회사" 하나를 골라내기로 하고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숫자할당에 대한 여론이 악화돼 있는 점을 감안, 대우 5개 SK 3개로
다시 조정했다.

한편 한일합섬은 퇴출로 분류됐다는 사실을 일치감치 알고 외부전문기관
에서 자문받은 구조조정방안을 판정위원회에서 설명하려 했으나 일부 위원들
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 이성태 기자 steel@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