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어떤 민족이 세운 국가였으며 그 영역은 어디까지였을까.

한국상고사학회는 25일 세종대에서 "백제의 지방통치"를 주제로 정기
학술대회를 연다.

이번 대회는 백제사에대한 새로운 시각과 연구방법론으로 무장한 젊은
학자들이 그동안 백제사연구에서 제기돼왔던 문제들을 문헌자료와 고고학적인
유물에 대한 비판적인 검증을 통해 재조명하는 자리여서 주목된다.

박찬규 단국대강사는 "삼국사기를 통해 본 백제전기의 통치영역"이라는
발제논문에서 객관성을 갖고있는 백제연구 문헌자료는 "삼국사기"가
유일하며 다른 문헌은 자료적 가치를 재검증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은 서울 몽촌토성으로 본래 백제의
왕궁성인데 반해 풍납토성은 일반인들이 살았던 거민성으로 추정했다.

그는 또 삼국사기 기록중 초기 백제의 영역으로 지목되고 있는 북쪽의
패하는 현 황해도의 예성강, 서쪽의 큰 바다는 강화도쪽 바다라고 주장했다.

박현숙 고려대 강사는 "백제사비시대의 영역과 지방통치"란 논문에서
"백제는 사비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지방체제형식을 도입, 5방 37군
중심의 확실한 지방체제를 갖추었다"면서 "37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면
백제의 영역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5방은 동방의 은진, 서방의 대흥, 중방의 고부, 남방의 광주 또는 나주,
북방의 공주로 이들 영역이 백제의 주요 활동무대였다는 것.

그는 "백제는 탐라국과 의례적인 복속관계를 가졌을뿐 통치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고 지적했다.

최완규 교수(원광대)는 "백제고분의 수용과 전개"라는 논문에서 "백제의
성장은 마한세력의 흡수 통합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백제의 고분을 통해
이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마한세력이 백제 초창기에 서해안을 중심으로 옹기로 만든 주구묘를,
내륙지역에서는 주구토광묘를 축조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다가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옮기면서 백제지배층이 횡혈식석실분을
쓰게됨에 따라 이형식이 빠른 속도로 지방으로 전파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사비시대에 접어들면서 고분양식이 거의 횡혈식 석실분으로
바뀌게 된다면서 이는 중앙세력이 지방세력을 장악하게 된 증거라고
최교수는 설명했다.

< 오춘호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