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들의 첫시집 3권이 화제다.

박현수(32)씨의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와 배정원(32)씨의 "지루한
유언", 소을석(37)씨의 "다락방에서의 유희"(청년정신).

이들은 모두 90년대 초반에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첫시집을 내는데 7~8년이나 걸린 셈.

데뷔하자마자 작품집을 내는 요즘 세태에 비춰 그만큼 공력이 많이 들어간
시집들이다.

이들의 시편에는 우울한 시대에 "사막"을 건너는 법이 암시돼 있다.

박현수씨의 시는 치열한 자기성찰에서 출발한다.

"누군 핏속에서/푸르른 혈죽을 피웠다는데 ""내게 어디/학적으로 쓸
반듯한/뼈 하나라도 있던가/.../이제/내게 남은 일이란/시누대처럼/
야위어 가는 것"(세한도)

뿌리도 없이 잡목숲보다 더 흔들리며 우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대.

그는 "지나온 삶이 보일 때면/남은 삶도/맑아진다고 하는/서른, /그 낮은
겨울 산"을 오르다 "희망" 한그루를 발견한다.

시인은 8행으로 이뤄진 절창 "비온 뒤"에서 그 희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잡목 숲에 멈춘/소나기는/바람이 밑둥을 지나자/후두둑/뛰어내린다/푸른
언덕엔/젖은 강아지처럼 몸을 터는/상수리 나무" 배정원씨는 "어려운
시절이 곧 닥치리라"는 걸 예견이라도 한 듯 "떠도는 영혼"들을 자주
이야기한다.

"아침에는 갈 곳이 없고/저물녘엔 전화할 곳이 없다/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몇 해 더 하게 된다면/난 얼마쯤 더 늙고 초라한 사내가 될 수 있을/것이다,
주머니 텅 비고 머리엔 불안이 까치집 지어/너에게서 더 먼 곳에 있게 될
것이다"(너에게), "다만 난 꽃의 그늘과 잎사귀의 그늘만을/보았다/...
/마음이야 몇 번 더 짤랑이다 부서진다 하여도"(아름다운그늘) 그런가하면
"다들, 행복의 나라로" 떠났던 친구들은 10년만에 "너무 행복하여/창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얗게 펄럭이는/명함 크기만한 얼굴들"을 보며 시인은 우리가 처음
떠났던 자리가 어디였던가를 묻는다.

박현수씨와 배정원씨의 작품이 깊이있는 성찰에 뿌리를 뒀다면 소을석씨는
"사막" 저편의 "오아시스"를 찾아 길떠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낙타와 "검은 강"이 자주 등장한다.

"불과 수십년, 숲은 우거졌어도/웬일인지 강은 검게 말라붙어 다시
목마르고/사람들은 하나 둘 강을 떠난다/.../자동차와 빌딩과 인간의
사막을 건너/생명의 향기가 풍기는 투명한 물내음/마음 속을 먼저 흐르는/
푸르른 강을 찾아"(와디)

"언덕을 오르면 또 언덕/강을 건너면 또 다른 강/마음이란 어찌 그리도
첩첩인지/안개여 제발/둥글게 모여다오/둥글게 모여 내게로 오는/하나의
빛이 되어다오"(안개3)

절망의 바닥에서 희망을 건져올리는 이들의 언어.

힘든 시대를 견디는 우리들에게 어떤 빛깔의 위안을 줄까.

<고두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