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은 신중해야 합니다. 주요 경제사안에 대해 수시로 견해를 밝히는
중앙은행총재는 어느나라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앙은행총재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선임된다고 합니다"

재야성향이 짙었던 경제학자출신 전철환 한국은행총재(60)는 말을 아낀다.

충남대교수 시절 후배교수들이나 학생들에게 조언이나 야단을 서슴지 않던
그였다.

총재로 임명된뒤 막중한 책임을 의식한듯 인터뷰도 미뤘다.

기업들이 애타게 바라는 금리인하에도 신중했다.

"장기적으론 당연히 금리를 내려야 합니다. 한은도 금리인하여건을 조성
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IMF와 협의해 신중히 결정
해야 합니다. IMF는 아직도 환율이 확고히 안정됐다고 평가하는 것같지
않습니다"

그는 한은 위상이 예전보다 떨어지고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는 지적에
수긍한다.

은행감독원이 분리돼 감독권한이 없어졌다.

반면 통화관리만으로 물가를 잡아야 하고 못하면 총재가 직접 책임을 지게
돼있다.

앞으로 한은총재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들이다.

그래서 감독원분리후 은행경영상태를 제대로 파악할수 있는 시스템마련에
고심중이다.

고시 12회 동기인 이 장관을 만났을때는 금융통화운영위원추천사무권을
한은에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새법시행으로 금통운영위원장이 재경부장관에서 한은총재로 바뀐데 따른
당연한 요청이라고 했다.

하지만 재경원은 묵묵부답.

전 총재는 초기인 만큼 재경원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확인과 명확한 근거를 중시한다.

취임후 부내를 돌아보면서 보일러 용량을 점검하고 정전으로 비상전력을
가동할때 정상출력에 도달하는 시간을 묻기도 했다.

전주고에 입학하기전 잠시 이리공업학교를 다녔고 기획원관리와 교수시절
기계공업이나 자본재산업발전관련 일을 많이 한 경력이 그같은 성향을 갖게
한것 같다.

농산물유통구조 개선업무를 맡았을때 직접 트럭을 타고다니며 유통실태를
파악하기도 했다.

전 총재는 역사나 철학책을 즐겨 읽는다.

역사학자 투키티데스를 특히 좋아한다.

그는 학계에선 흔한 박사학위가 없다.

관리를 지내다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사학위없어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실력이 없어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학계에선 서울대 상대 동창이자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사장으로 선임된
안병직교수와 가깝다.

그의 집 거실에는 좌우명처럼 생각하는 노동신성이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다.

그래서인지 주말에는 업무용차 아카디아를 손수 운전하기도 한다.

총재에 취임한지 16일로 이제 열흘.

그는 아직 제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부담스런 과제만 쌓여 있다.

한은을 향한 개혁요구가 보통 거센게 아니다.

정부와 민간기업 모두 조직개편과 인원절감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음에도 한은만 무풍지대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은행에 대해서는 권한을 행사하려하고 재경부에 대해선 비판을 쏟아부으면서
도 자신에 대해선 관대하다는 비난에 전 총재는 답해야 한다.

실물경제난이 심화될수록 날카로워질 기업들 비난도 큰 부담이다.

전 총재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

<고광철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