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인 체코작가 밀란 쿤데라가 새 소설 "정체성"
(이재룡역 민음사)을 내놨다.

첫 소설 "농담"부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까지 철학적
글쓰기로 일관했던 그가 이번에는 중년 남녀의 사랑을 경쾌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은 51개의 짧은 필름을 이어놓은 것처럼 구성돼 있다.

주인공은 아들을 잃고 이혼한 뒤 광고회사에 다니는 샹탈과 그의 애인
장 마르크.

두 사람의 시점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복잡한 내면세계가 갈피마다
펼쳐진다.

소설은 노르망디 해변가의 한 호텔에서 시작된다.

"남자들이 더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무기력해하는 샹탈.

그녀에게 어느날 익명의 편지가 도착했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아름다워요"

그녀는 낯모르는 남자의 편지를 읽으며 예닐곱살 무렵 가슴에 품고
지내던 장미향이 되살아나는 걸 느낀다.

어떤 날은 편지 내용이 대담해진다.

"3일 동안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다시 보았을 때, 당신은
그 어느때보다도 늘씬한 몸매로 경쾌하고 디오니소스적이고 도취한 듯한
야만적 불꽃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불꽃처럼 빨간 당신..."

며칠후 그녀는 빨간 잠옷을 산다.

그날밤 그녀는 오랜만에 장밋빛 침대에서 새로운 행복을 발견한다.

그런 다음날 아침은 더없이 청량하다.

그러나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기 남자"인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일종의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런던으로의 일탈"을 감행하고 장 마르크는 그녀를 찾아 런던행
기차를 탄다.

결국 이곳에서 둘은 서로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는다.

샹탈은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남자, 장 마르크의 관심속에
자신이 포근하게 감싸안겨 있다는 걸 절감한다.

49장까지 장 마르크와 그녀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소설이 50~51장에
오면 작가의 시점으로 돌변한다.

작가는 라스트신에서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이렇게 읊는다.

"나는 조그만 머리맡 스텐드 불빛을 받고 있는 그들 두사람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 베개위에 목덜미를 기댄 장 마르크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예요. 하염없이 당신만
바라보겠어요"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