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새 정부 첫 감사원장에 지명된 한승헌 변호사는 국내 인권운동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는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절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던져
인권의 "횃불"을 밝혔던 사람이다.

"산민"이라는 아호가 말해주듯이 그느 34년 무주 구천동 자락인 전북
진안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전주고와 전북대 정치학과를 졸압한뒤 57년 고시 사법과(8회)에 합격,
법조인의 길로 접어든다.

검사로 임관한 그는 쟁쟁한 동기들이 많아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고시 8회동기중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명예총재가 있으며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지낸 인사와 대법관이 각각 7명씩이나 된다.

그는 5년간의 검사생활을 끝으로 65년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다.

"제도권"에서 벗어난 이때부터 30여년간 한변호사의 인생은 독재와
불의에 맞선 항거와 투옥의 연속이었다.

문인으로 글쓰기도 즐겼던 그는 필화사건의 변호를 많이 맡았다.

남정현의 소설 "분지", 김지하 시인의 "오적"사건 등을 변호하면서
권력의 폭압에 맞섰다.

시국사건을 변호해오던 그는 75년 반공법위반으로 구속 당한다.

박정희 정권은 사형제도를 비판한 그의 수필내용에 용공성이 있다고
조작했다.

실제로는 김지하 시인의 변호사를 맡는 등 반독재투쟁을 해온 것이
이유였다.

그 결과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한 그는 복권될때까지 출판사로 생계를
꾸려가며 재야활동을 계속한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는 지난 71년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던 김당선자가 낙선한뒤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됐을 때 그가 변호를 맡았다.

이어 77년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씨가 공동대표로 있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에 집행위원으로 참여, 민주화 투쟁을 같이했다.

"친 DJ계"로 분류된 한변호사는 80년 이른바 "김대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1년간 복역한다.

83년 복권되면서 변호사 자격을 회복했으며 최근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진상조사위를 구성,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청렴성 강직성과 함께 문인으로서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감사원장에 적격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부인 김송자(64)씨와 3남 1녀를 두고 있다.

<이건호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