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외환대란'] (10.끝) '끝나지 않은 대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실록 외환대란 시리즈를 취재하면서 많은 사실들이 새로 밝혀졌다.
오판이 거듭됐고 대통령과 장관들은 대란의 홍수가 목에까지 차올라왔던
11월7일에야 비로소 환란의 실체를 인식했다.
대미관계를 제대로 풀지못해 막상 어려움이 닥쳤을 때 미국은 등을 돌렸고
내부적으로 기아 등 부실기업들과 금융권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적전분열을 거듭했음이 확인됐다.
그것은 기업의 실패, 금융의 실패, 정책의 실패, 경제외교의 실패 등
시스템 전체가 총체적으로 붕괴된 결과였다.
실록을 취재하면서 기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화두는 과연 누구에게
이 엄청난 고통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불행히도 답을 얻지 못했다.
우선 미국의 음모에 걸려든 결과라는 주장도 많았다.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미국의 움직임을 보다 면밀히 관찰했더라면 대책이 달라졌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9월에 끝난 자동차 협상 등에서 보듯 미국과는 사사건건 마찰이었다.
"문민정부의 대미관계가 최악이었다"고 강경식 부총리도 아쉬워했다.
쇠고기 O-157파동이 발생했을 당시 원만한 해법을 호소해왔던 클린턴
대통령은 불과 두달이 못돼 국가부도를 경고하는 전화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걸었음이 확인됐다.
음모의 실체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쳐 지나간 족적은 발견할 수 있었다.
경제팀이 대란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장상황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흔적도 역력했다.
구제금융 신청금액(3백억달러)에 대한 오산이나 달러유출 속도 등에 대한
오판, 환란의 파급효과 등에 대한 분석은 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했다.
금융시장 상황이 경각을 달리하고 국내정치 여건이 여의치 못했는데도
원칙론만을 고집했던 잘못도 컸다.
막판까지 13개 금융개혁법을 일괄 처리해줄 것을 대선을 앞둔 국회에
요구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였다.
강부총리팀은 한은법 등을 이번 기회에 해치우지 않으면 더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외환대란을 다루는 일이야말로 더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재경원과 한국은행이 금융주도권을 놓고 아귀다툼을 하는 사이에 제방이
무너지고 있었기에 금융개혁법 처리고집은 환란의 한 원인으로밖에 평가받지
못하게 됐다.
기아사태도 문제였다.
한국의 대기업에 대한 국제시장의 인식이 달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게
기아였다.
내부적으로도 대기업 연쇄부도의 첫고리가 됐다.
경제팀은 "문제는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 같았지만
결국 고구마 줄기 뽑히듯이 우리경제의 취약점들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까지
노출된 결과가 외환대란이었다.
강부총리는 최근 "부실을 모두 드러낼수도 없었고 완전히 감출수도
없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취재 과정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정권말기에 원론주의자(래디컬)들을
기용한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김대통령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역시 용병술이 문제였다.
사실 IMF행을 언제 결정했고 누가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했느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점도 확인됐다.
대통령이 IMF행을 망설였다는 증거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망설였던 것은 오히려 정부였다.
대통령은 IMF로 간다는 결론을 11월10일께는 분명히 받아들인 것같았다.
강부총리의 최종 결정은 13일 밤이었는데 대통령은 "왜 빨리 IMF로 가지
않느냐"고 채근한 증거가 있었다.
물론 이미 홍수를 막기엔 늦은 때였다.
경제부총리와 대통령의 관계도 매끄럽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은 현직 부총리의 보고보다는 전직장관들의 고언을 더욱 신뢰한
것같았다.
IMF와 관련해서는 홍재형 부총리의 전화가 대통령을 움직였고 한은총재의
말에 더욱 의존했다.
결국 강부총리는 10월29일에 11월20일자 사표를 썼고 대통령은 강부총리를
경질하기 9일전인 11월10일께 이미 그를 경질하기로 결심했음이 밝혀졌다.
한국은행이 여러차례 대란을 경고했다는 것은 근거가 약해보였다.
한은의 다양한 경고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일반론에 불과했다.
그것은 경고임에는 분명했으나 구체성을 띤 것은 아니었다.
다른 연구기관들의 각종 보고서도 원칙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적 리더십의 공동화 현상도 외환대란의 전과정에서
큰 몫을 했다.
국회나 정당은 아무런 위기경보장치를 갖고 있지 못했을 뿐더러 대란을
막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직업관료들에게 집행이 아닌 "판단"까지 맡길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됐다.
지휘계통에 따라 상명하복으로 일하는 직업공무원들이 환율 정책의 큰
골격이나 경제운영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 게다가 급변하는 시장을 컨트롤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는 새정권에서 연구해볼 과제라 할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왜 IMF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조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그것은 청문회 같은 정치적 프로세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문가집단(예를
들어 위원회)의 차분한 분석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취재팀의
결론이었다.
대란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중에 바뀐 것은 대통령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국제 금융계의 동향, 아시아 금융위기, 기업들의 과도한 채무, 금융구조의
낙후성, 대외관계에서의 국수주의적 태도 역시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시리즈를 마치면서도 여전히 숙제를 풀지 못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 취재팀 =정규재.최승욱.박기호.김성택.오광진.조일훈 기자 >
[[ 외환대란 7대 원인 ]]
1. 대립연속 한미관계 최악
2. 무능력 경제팀 오판 거듭
3. 기아사태 처리 지지부진
4. 적자 느는데 원절하 기피
5. 막판 환율방어 달러소진
6. 한은법 매달려 시장 방치
7. 정치권 집권에만 혈안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23일자).
오판이 거듭됐고 대통령과 장관들은 대란의 홍수가 목에까지 차올라왔던
11월7일에야 비로소 환란의 실체를 인식했다.
대미관계를 제대로 풀지못해 막상 어려움이 닥쳤을 때 미국은 등을 돌렸고
내부적으로 기아 등 부실기업들과 금융권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적전분열을 거듭했음이 확인됐다.
그것은 기업의 실패, 금융의 실패, 정책의 실패, 경제외교의 실패 등
시스템 전체가 총체적으로 붕괴된 결과였다.
실록을 취재하면서 기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화두는 과연 누구에게
이 엄청난 고통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불행히도 답을 얻지 못했다.
우선 미국의 음모에 걸려든 결과라는 주장도 많았다.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미국의 움직임을 보다 면밀히 관찰했더라면 대책이 달라졌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9월에 끝난 자동차 협상 등에서 보듯 미국과는 사사건건 마찰이었다.
"문민정부의 대미관계가 최악이었다"고 강경식 부총리도 아쉬워했다.
쇠고기 O-157파동이 발생했을 당시 원만한 해법을 호소해왔던 클린턴
대통령은 불과 두달이 못돼 국가부도를 경고하는 전화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걸었음이 확인됐다.
음모의 실체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쳐 지나간 족적은 발견할 수 있었다.
경제팀이 대란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장상황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흔적도 역력했다.
구제금융 신청금액(3백억달러)에 대한 오산이나 달러유출 속도 등에 대한
오판, 환란의 파급효과 등에 대한 분석은 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했다.
금융시장 상황이 경각을 달리하고 국내정치 여건이 여의치 못했는데도
원칙론만을 고집했던 잘못도 컸다.
막판까지 13개 금융개혁법을 일괄 처리해줄 것을 대선을 앞둔 국회에
요구한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였다.
강부총리팀은 한은법 등을 이번 기회에 해치우지 않으면 더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외환대란을 다루는 일이야말로 더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재경원과 한국은행이 금융주도권을 놓고 아귀다툼을 하는 사이에 제방이
무너지고 있었기에 금융개혁법 처리고집은 환란의 한 원인으로밖에 평가받지
못하게 됐다.
기아사태도 문제였다.
한국의 대기업에 대한 국제시장의 인식이 달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게
기아였다.
내부적으로도 대기업 연쇄부도의 첫고리가 됐다.
경제팀은 "문제는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것 같았지만
결국 고구마 줄기 뽑히듯이 우리경제의 취약점들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까지
노출된 결과가 외환대란이었다.
강부총리는 최근 "부실을 모두 드러낼수도 없었고 완전히 감출수도
없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취재 과정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정권말기에 원론주의자(래디컬)들을
기용한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김대통령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역시 용병술이 문제였다.
사실 IMF행을 언제 결정했고 누가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했느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점도 확인됐다.
대통령이 IMF행을 망설였다는 증거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망설였던 것은 오히려 정부였다.
대통령은 IMF로 간다는 결론을 11월10일께는 분명히 받아들인 것같았다.
강부총리의 최종 결정은 13일 밤이었는데 대통령은 "왜 빨리 IMF로 가지
않느냐"고 채근한 증거가 있었다.
물론 이미 홍수를 막기엔 늦은 때였다.
경제부총리와 대통령의 관계도 매끄럽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은 현직 부총리의 보고보다는 전직장관들의 고언을 더욱 신뢰한
것같았다.
IMF와 관련해서는 홍재형 부총리의 전화가 대통령을 움직였고 한은총재의
말에 더욱 의존했다.
결국 강부총리는 10월29일에 11월20일자 사표를 썼고 대통령은 강부총리를
경질하기 9일전인 11월10일께 이미 그를 경질하기로 결심했음이 밝혀졌다.
한국은행이 여러차례 대란을 경고했다는 것은 근거가 약해보였다.
한은의 다양한 경고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일반론에 불과했다.
그것은 경고임에는 분명했으나 구체성을 띤 것은 아니었다.
다른 연구기관들의 각종 보고서도 원칙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적 리더십의 공동화 현상도 외환대란의 전과정에서
큰 몫을 했다.
국회나 정당은 아무런 위기경보장치를 갖고 있지 못했을 뿐더러 대란을
막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직업관료들에게 집행이 아닌 "판단"까지 맡길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됐다.
지휘계통에 따라 상명하복으로 일하는 직업공무원들이 환율 정책의 큰
골격이나 경제운영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 게다가 급변하는 시장을 컨트롤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는 새정권에서 연구해볼 과제라 할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왜 IMF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조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그것은 청문회 같은 정치적 프로세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문가집단(예를
들어 위원회)의 차분한 분석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취재팀의
결론이었다.
대란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중에 바뀐 것은 대통령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국제 금융계의 동향, 아시아 금융위기, 기업들의 과도한 채무, 금융구조의
낙후성, 대외관계에서의 국수주의적 태도 역시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시리즈를 마치면서도 여전히 숙제를 풀지 못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 취재팀 =정규재.최승욱.박기호.김성택.오광진.조일훈 기자 >
[[ 외환대란 7대 원인 ]]
1. 대립연속 한미관계 최악
2. 무능력 경제팀 오판 거듭
3. 기아사태 처리 지지부진
4. 적자 느는데 원절하 기피
5. 막판 환율방어 달러소진
6. 한은법 매달려 시장 방치
7. 정치권 집권에만 혈안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