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에너지연구회(회장 최동규)는 10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창립 10주년 기념 세미나를 가졌다.

"동남아국가의 금융위기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 주제의 이날 세미나에서
아시아개발은행(ADB) 이봉서 부총재가 초청돼 기념강연을 했다.

이 부총재는 ADB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태국의 외환위기를 깊숙히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부총재는 우리나라에 앞서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을
지원받은 태국의 경제상황을 우리와 비교하고 향후 대책을 진단했다.

이 부총재의 강연내용을 간추린다.

<편집자>

======================================================================

내가 강연요청을 받은 2주일전의 상황과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상황은 너무
다르다.

사실 나는 지난달 26일 한국을 방문, 경제부총리와 국제통화기금(IMF)의
나이스국장을 잇따라 만나 한국경제상황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경제상황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방콕으로 돌아가면서도 한국경제에 문제는
있지만 심각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후 우리나라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이제는 앞으로의 우리나라 경제상황을 차분히 짚어볼 때가 됐다.

동남아 외환위기의 핵심은 이제 한국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위기는 독립적으로 생긴게 아니라 동남아 외환위기의 파생
적인 효과다.

이른바 오염효과인 셈이다.

동남아 외환위기의 진원지인 태국이 어떤 이유로 외환위기가 일어났는지를
되새겨 보고 우리의 상황과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태국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함께 90년대 들어서는 새로운 호랑이의
출현으로 평가받았다.

서구 기관투자가들은 70,80년대에 아시아 4마리 용에게 돈을 빌려줘
재미를 많이 봤다.

선진국의 투자가들은 동양의 새 호랑이에게 돈을 빌려주면 새로운 금융
수요처를 개발하고 이익이 생길 것으로 판단, 집중적으로 돈을 빌려주자고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다시 말해 외국 투자가들이 돈을 빌려줄 자세가 돼 있었다.

선진국들은 외국의 돈을 빌려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좋은 시책이 될
것이라고 태국에 조언하기도 했다.

금융 및 자본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태국은 선진국 및 외국투자가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후죽순처럼 금융기관들이 설립됐다.

우리나라 금융기관에 구태여 비교하자면 종금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규모는 종금사에 비해 작다.

1백여개의 금융기관이 들어선후 경쟁적으로 해외에서 돈을 빌려와 국내에
다시 빌려주는 돈장사하는 업체가 활황세에 올랐다.

태국의 금융기관들은 산업체에 돈을 빌려주기 보다는 이익을 많이 챙길 수
있는 부동산에 집중 투자하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해외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꿔서 국내에 높은 금리로 돈장사를
하는데 필수조건은 환율이 고정돼 있어야 한다.

환율이 변동되면 태국의 경우 저금리의 이익이 없기 때문에 고정금리를
만들어서야만 선진국의 낮은 금리를 자기나라의 높은 금리로 빌려주고 갚을
때는 고정금리로 갚으니까 장사가 됐다.

그래서 고정환율 정책은 금융기관에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어 금융인들은
계속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도록 정부에 요구했었다.

그래서 부동산에 투자한 실력있는 기업들이 정부에 고정환율제가 옳은
정책이라고 주문했다.

태국정부도 환율이 고정돼야 안정된 경제지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고정환율제를 채택했다.

그래서 90년대 들어 계속 달러와 연동된 환율을 채택하자 바트화는 25대1
전후에서 4~5년 유지돼 왔다.

그러나 경제가 잘 풀리면 내부에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태국경제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환율을 고정시키고 미국과 무역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바트화의
고평가 효과가 나왔다.

환율이 평가절하되지 않고 고평가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수출경쟁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태국경제 상황은 좋았지만 무역적자는 늘어났다.

무역적자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태국 정부는 바트화의 고정환율을 고집
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좋지만 속으로는 곪는 상황이 일어났다.

또 부동산은 투자해서 외국에 수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금융기관이 부동산에 지나치게 투자하면 과잉투자를 경제가 소화해
낼 수 없게 됐다.

태국은 96년에 들어서 지나친 부동산투자에 의해 생기는 부정적인 효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을 지었으나 팔리지도 않고 부동산시장이 무너지게 됐다.

부동산을 담보로 잡았던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가경제는 국제수지에서 곪기 시작, 걷잡을 수 없는 외환위기로 발전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태국과는 성격이 다르다.

한보 기아사태 등으로 인한 대기업그룹의 부도로 부실채권이 늘어나면서
금융기관이 휘청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국제통화기금은 우리나라에 구제금융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국제통화기금과 구제금융 조건을 다시 협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백지상태에서 네고하자는 얘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빌려온 돈을 갚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시 하자는 주장은 불가능하다.

그 말이 나오는 즉시 앞으로 나올 돈은 동결된다.

그동안에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준 것도 찾아갈 상황인데 추가 돈이
나오겠는가.

새로운 협상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이 동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일단 저질러놓은 일이다.

게다가 IMF는 요구사항에 타임스케줄을 제시했고 국제통화기금 관계자들이
한국에 와서 상주하며 분기별로 이행사항을 점검한다.

때문에 IMF의 이행사항을 수행해가는 과정에서 문제있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국제통화기금도 신이 아니기 때문에 요구조건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

서로 객관적으로 합의가 되면 상황에 따라 협의를 통해 부분적인 개선을
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것과 새로 협상을 한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

기본틀은 인정하고 여건을 바꿔가는 얘기와 새로 하자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국제통화기금의 자금은 외국국민의 세금에서
갹출된 돈이다.

많은 나라국민들이 할 얘기가 많다.

한국이 잘못해 경제위기에 빠진 것을 왜 우리 세금으로 지원해주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이 우리나라에 내세우는 지원조건보다 지원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나라도 있다.

특히 미국의 국회의원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한국이 경제개혁을 하기 때문에 지원해준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불만있는 사람들은 당장 주지말자고 들고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제통화기금이 흔들리면 한국에 대한 지원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모두 다 한국경제가 좋아지라고 하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이 없더라도 경제난국의 쓴 약을 우리모두 마셔야
한다.

우리 스스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못하면 주저않는 것이다.

국제가 어려운 부분을 지원해주는 효과를 바라는 것이 우리로서 득이다.

손은 있을 수 있으나 국제통화기금의 요구조건중 우리만 좋다는 것을 할
처지는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해놓은 다음 조건을 바꾸자고 할 수는 있다.

스스로 이행하지도 않고 바꾸자고 먼저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국제통화기금의 요구가 곰곰 따져보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우리가 돈을 빌리는 주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 금융기관이라도 돈을 빌려가는 순간부터 조건을 바꾸자고 한다면
차입자에게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상상해보라.

일을 제대로 하고 장사가 잘 되니까 조건을 바꿔 달라고 하면 얘기된다.

후자를 택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