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을 뚫고 공항대합실을 빠져 나와 대기중이던 차에 몸을 실은 김선홍
회장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시선은 차창밖을 흘러가는 한강에 두었지만 머리속에는 지난 인생의 역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전북 익산의 농가에서 보낸 유년 시절.
소년 김선홍은 그때부터 라디오를 뜯어보며 기술자의 꿈을 키웠고 그 꿈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서울대 기계공학과 입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58년 1월4일.
이날 청년 김선홍은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 공채 1기로 채용돼 첫
출근을 한다.
인간 김선홍의 40년에 걸친 "수레바퀴" 인생드라마가 막을 올리는 순간
이었다.
신참내기 김선홍사원의 활동무대는 바로 청계천변.
이곳에서 드럼통을 펴서 만들어 놓은 함석판을 구매하는 일이 그의 업무
였다.
회사에서는 이 함석판으로 자전거용 파이프를 만들었다.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1970년.
그 사이 김선홍사원은 김이사로 승진했다.
그해 정확히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던 7월7일 기아의 창업주 학산(학산)
김철호회장은 김이사를 자택으로 호출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학산은 김이사에게 소하리일대의 지적도를 꺼내 놓았다.
"이제 고속도로가 뚫렸으니 우리도 자동차공장을 지을 때가 됐지"라는
말과 함께.
이렇게 해서 서른여섯의 나이에 공장건설 본부장에 임명된 김이사는
73년6월 드디어 소하리 23만평 대지에 자동차공장을 우뚝 세워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일괄공정 시스템을 갖춘 종합자동차공장이었다.
이듬해 4월 우리나라의 국민차 1호라고 할 수 있는 브리사가 이 공장에서
탄생했다.
기아기공사장 등을 거쳤던 김사장이 다시 자동차에 복귀한 것은 81년10월.
당시 창업주의 아들인 김상문사장이 맡고 있던 기아자동차는 침몰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79년에 몰아닥친 1차 오일쇼크와 10.26사태로 인한 혹독한 불황탓이었다.
게다가 정부의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로 회사의 존폐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경영권을 넘겨받은 김사장이 재기의 비책으로 내놓은 것이 "봉고작전"
이었다.
1t짜리 트럭을 12인승 승합차로 개조해 내놓은 봉고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 "봉고신화"라는 말과 함께 김사장을 "한국의 아이아코카"로 만들었다.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곧이어 82년에는 일본의 마쓰다, 미국의 포드와
손잡는 3각협력체제를 구축, 프라이드를 탄생시켰다.
또 84년에는 아산만공장 건설에 나서는 등 자동차 경영인으로서 승승장구를
거듭, 마침내 90년에는 비오너로서는 처음으로 30대그룹회장에 올라서는
신화를 창조했다.
< 임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