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도안은 국민들의 다양한 욕구와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만큼 소재
선택과 제작과정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된다.

때로는 전문가의 고증을 받기도 하고 여론조사와 공청회를 거치기도 하지만
개인이나 이익집단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따라 평가가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논란이 일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안소재와 도안작업에 얽힌 논란이 적지 않았다.

1973년에 최초로 발행된 만원권의 세종대왕 초상화는 지금까지 5번이나
바뀌었다.

공식적으로 전해내려오는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없다보니 작가및 고증방법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게 돼 이의가 제기되면 다시 바꾸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
것이다.

천원권에 쓰인 퇴계 이황 초상의 경우에도 1975년에 처음 발행될 당시에는
다소 여위고 마른 편으로 그려졌다.

퇴계 이황이 병이 잦았고 초식을 즐겼으며 깔끔한 성품이었다는 사학계의
고증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상의 모습이 다소 초라하다는 여론에 따라 1983년부터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담게 됐다.

도안소재에 대한 논란이 가장 컸었던 사례는 발행공고까지 했다가 화폐발행
계획자체를 취소시킨 경우이다.

1972년 한국은행은 석굴암의 본존 석가여래좌상을 앞면소재로 하고 불국사
전경을 뒷면소재로 한 만원권을 발행키로 하고 각 언론사와 관보를 통해
발행공고를 마쳤다.

그러나 특정종교를 두둔한다는 기독교계의 반발과 신성한 부처님을 지폐에
담았다는 불교계의 비난이 거세게 제기됐다.

게다가 시중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이 독실한 불교신자인 점을 들어
의도적으로 지폐에 부처상을 넣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처럼 도안소재에 대한 반론이 끊이지 않자 한국은행은 만원권 발행계획을
취소하고 이듬해인 1973년에 앞면 세종대왕상, 뒷면 경복궁 근정전을 소재로
한 만원권을 다시 발행했다.

결국 도안소재 시비로 만원권 발행이 1년가량 늦어진 셈이다.

또 1962년에 발행된 1백환권에는 한 여인이 아이와 함께 저축통장을 보고
있는 모습의 모자상을 앞면소재로 사용했다.

이는 군사정권이 경제개발 초기에 범국민적인 저축운동을 전개하면서
상징적인 테마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조폐관계자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영부인과 그 아들을
일부러 그려넣었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1988년 대통령선거 직전에는 10원 동전의 다보탑내 돌사자상이 특정후보의
당선을 위해 새겨진 돌부처상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1966년 최초 발행된 당시에는 없었던 돌사자상을 1983년 도안정비
과정에서 다보탑 원형대로 새겨놓은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폐도안은 대부분 197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물초상이 조선시대에 편중돼 있고 현재적인 감각도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따라서 앞으로 화폐도안을 바꾼다면 원화의 국제화에 부합하고 통일시대에도
통용될수 있는 한국적 이미지의 도안소재를 발굴해야 할 것이다.

여운선 < 한국은행 발권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