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4일 갑자기 대규모기업집단 지정제도의 전면 폐지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각종 신대기업정책들이 모두 이 제도에서
기인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올들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신대기업정책에 일일이
대응하다 지친 재계가 신대기업정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경제력집중
억제 논리를 정면으로 맞받아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부와 재계는 올들어 경제위기 상황이 계속되면서 사사건건 대립해 온 게
사실이다.

그 와중에서 재계는 "경제가 어려운 만큼 정부는 지원책 마련에만 신경써
달라"고 요청해왔지만 정부는 "이럴 때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며
고개를 돌려 서로 평행선을 달려왔다.

결과는 매번 그렇듯 정부의 승리였다.

그리고 정부가 추진중인 <>기업재무구조 개선 <>소유구조 선진화 등
새로운 대기업 정책은 최근 세법개정안에서 보듯 차례차례 입법화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재계가 초조해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날 전경련 회의는 5공 이후 국내 대기업정책의 한 줄기를
형성해온 경제논리의 타당성여부를 공론화시킴으로써 정부가 추진중인
신대기업정책에 제동을 걸겠다는 재계의 의도가 집약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대규모기업집단 지정 당사자인 30대그룹의 기조실장들이 여론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그만큼 경제위기 해법의 부재를
보는 재계의 심정이 절박하다는 반증으로도 볼 수 있다.

전경련 이용환 이사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대기업 정책이 추진되고
입안돼 기업들은 눈치보느라 일을 못하고 있다"고 재계의 분위기를 전했다.

물론 재계의 이런 주장이 정부에 어떻게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이번 전경련 기조실장 회의를 계기로 정부의 신대기업정책에는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을 것이란게 재계 관계자들의 예상이다.

"정의사회 구현"을 모토로 경제 보다는 정치적인 판단에서 5공화국 때
만들어진 이 제도가 국경없는 경쟁시대인 90년대말에도 유효한 것이냐는
재계의 문제제기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5대그룹보다 훨씬 더 큰 덩치를 가진 다국적 기업들이 이미 국내
시장을 휘젓고 있는 현실에서 국내 대기업이나 기업집단의 확대를 규제하는
정책은 사실상 의미를 잃은지 오래라는 주장이 그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제기
되어 왔다.

더구나 왠만한 다국적 기업에 비해 규모나 경영능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6대그룹 이하 대기업집단의 경우는 30대그룹 내에서 합의를 본 만큼
대규모기업집단 지정의 축소는 이번에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재계의 갑작스런 강공에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지 주목된다.

<권영설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5일자).